관절염치료제 '케펜텍'으로 잘 알려진 제일약품은 1959년 제일약품산업으로 출발해 1976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창업주 고(故) 한원석 회장이 초대 대표이사를 맡아 경영해오다 1985년 2세 한승수(72) 회장이 38세가 되던 해 대표이사 바통을 이어받았다. 1987년 창업주가 별세하면서 지분 승계도 이뤄져 한승수 회장이 최대주주에 올랐다.
그리고 20년 뒤엔 3세가 등장했다. 한승수 회장의 장남 한상철(43) 사장은 연세대와 미국 로체스터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다국적 제약사를 거쳐 2007년 제일약품 마케팅 이사로 입사했다. 39세에 2015년 제일약품 부사장에 올랐고, 2017년 6월 지주회사 제일파마홀딩스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한 사장은 일반의약품을 담당하는 제일헬스사이언스 대표이사도 겸임하고 있다.
2세 한승수 회장과 3세 한상철 사장은 나란히 30대 후반에 경영권을 물려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창업주에서 2세로 넘어갈 때는 지배구조에 변화가 없었지만 2세에서 3세로 넘어가는 과정에선 지주회사 체제를 선택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 두 번의 쪼개기로 인위적 지주회사 전환
제일약품은 사업구조나 지분관계만 따져보면 굳이 지주회사로 전환할 이유가 없다. 지주회사(持株會社)는 다른 회사 주식 소유가 본업인데 제일약품은 설립 때부터 최근까지 다른 계열사가 없는 '나 홀로 회사'였기 때문이다. 외국 제약사와 합작한 한국오츠카제약과 제일야오 정도만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제일약품은 지주회사로 전환하기 위해 두 번에 걸쳐 회사를 쪼갰다. 먼저 2016년 물적분할로 일반의약품을 담당할 제일헬스사이언스를 분리하고, 지난해 6월엔 인적분할로 전문의약품을 담당하는 제일약품을 남겨두고 지주회사 제일파마홀딩스를 만들었다.
두 번의 분할로 단일회사였던 제일약품은 지주회사인 제일파마홀딩스가 제일약품(전문의약품)과 제일헬스사이언스(일반의약품)를 자회사로 거느린 구조로 변신했다. 한 회사를 3개로 쪼갠 이유는 사업부분별 전문성 강화라는 측면도 있지만 경영승계 목적을 빼놓고 설명하긴 어렵다.
물론 회사를 분할한다고 곧바로 승계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지주회사 전환 전 제일약품 지분율은 2세 한승수 회장이 27.3%, 3세 한상철 사장이 4.7%였다. 인적분할은 기존 지분율만큼 신설회사 주식을 배정받은 만큼 한 회장과 한 사장의 지주회사 지배력(지분율)은 분할 전과 똑같다.
다만 창업자 일가 입장에선 지배력을 높일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될 수 있다.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대다수 기업처럼 창업자 일가가 보유한 자회사 지분을 지주회사에 넘기고, 그 대가로 지주회사 주식을 받으면 돈 한 푼 안 들이고 단숨에 지배력을 끌어올릴 수 있어서다.
# 과세이연 일몰 전 현물출자 유상증자로 지분확대
이 과정이 지난달 2일 제일파마홀딩스가 발표한 현물출자 유상증자다.
현재 제일파마홀딩스는 제일약품 지분 13.5%를 가지고 있는데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 요건을 맞추려면 지분율을 최소 20%로 끌어올려야 하고, 향후 법 개정까지 대비하면 30%까지 높여야 한다. 이를 위해 제일약품 주주들을 대상으로 주식 공개매수에 나섰고, 그 대가로 자사 주식을 새로 발행해 나눠주기로 한 것이다.
제일파마홀딩스가 공개매수에 나선 제일약품 주식은 700만 주(47.6%)며, 목표 물량을 다 채운다면 지분율은 기존 13.5%에서 61.1%로 크게 높아진다. 목표 물량의 절반만 매수해도 37.3%를 보유해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 요건을 여유 있게 채운다.
그러나 이번 현물출자 유상증자의 목적은 제일파마홀딩스가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 요건을 충족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진정한 수혜자는 따로 있다. 바로 제일약품 창업주 일가다.
창업주 일가 입장에선 제일약품과 제일파마홀딩스 주식을 맞바꾸는 주식교환을 하는 셈인데 그러면 교환비율이 중요하다. 이번 공개매수에선 제일약품 주식 1주당 제일파마홀딩스 주식 2.25주를 나눠준다. 이 비율은 1년 전 같은 방법으로 주식을 교환한 일동제약(교환비율 일동제약 1주당 일동홀딩스 0.95주)과 비교하면 창업주 일가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일반적으로 창업주 일가가 주식교환 과정에서 더 많은 지주회사 주식을 확보하려면 자회사 주식이 비싸고 지주회사 주식은 싼 시점에 맞바꿔야 하는데 제일약품은 이 원칙에 가장 충실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제일약품 창업주 일가가 현 시점에 지주회사 지배력을 극대화할 카드를 꺼내든 건 교환비율도 매력적이지만 세금 혜택도 무시할 수 없다.
조세특례제한법에 따라 지주회사 전환 시 현물출자에 의한 양도차익은 세금납부를 연기(과세이연)해준다. 현물출자에서 발생하는 양도세는 경우에 따라 수십억에서 수백억원에 이르지만 이 세금은 해당 주식을 팔 때까지 걷지 않는다는 얘기다.
지주회사 주식은 대주주 경영권과 직접 연결되는 만큼 상속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팔지 않는다. 사실상 반영구적으로 세금 면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셈이다.
변수는 이 혜택이 주어지는 시한이 올해 말까지라는 점이다. 일몰조항(Sunset Clause)이기 때문이다. 이 조항은 지난 2000년 기업들의 지주회사 전환을 유도하기 위해 시행한 한시법이었고, 이후 수차례 일몰 연장을 거듭하며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정부는 이번에도 일몰시한 연장을 고려하고 있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다.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은 일몰을 더 연장해선 안 된다는 법안을 최근 제출했다. 제일약품 창업주 일가가 세금 혜택의 불확실성 없고, 교환비율도 유리한 지금을 지주회사 주식으로 갈아타기 위한 최적기로 판단한 셈이다.
# 소액주주 참여 저조할수록 창업주 일가 유리
제일약품 주식 1주당 제일파마홀딩스 주식 2.25주를 나눠주는 교환비율에 따라 제일약품 주식을 각각 401만6153주(27.3%), 68만5728주(4.7%)씩 가지고 있는 2세 한승수 회장과 3세 한상철 사장은 이번이 지주회사 지배력을 높이는 절호의 기회다.
자신들이 가진 모든 제일약품 주식을 바꾸는 데 성공한다면 각각 제일파마홀딩스 지분을 903만 주, 228만 주씩 확보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두 사람의 제일파마홀딩스 지분율은 50.9%, 8.7% 수준(총발행주식은 공개매수 주식 전량 확보 가정)으로 단숨에 높아진다.
관건은 창업주 일가를 제외한 제일약품 소액주주들이 이번 공개매수에 얼마나 응할지 여부다. 통상 소액주주들은 지주회사보다는 사업회사(제일약품)를 선호하기 때문에 현물출자 유상증자 참여율이 저조하다. 공개매수 수량(제일약품 주식 700만 주)이 정해져 있는 만큼 소액주주의 참여율이 낮을수록 창업주 일가는 지주회사 주식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다.
제일파마홀딩스는 제일약품 주식 700만 주가 반드시 필요하진 않다. 앞서 살펴본 대로 절반만 있어도 공정거래법을 충족하는 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창업자 일가는 이번 기회에 더 많은 지주회사 주식을 확보하길 원하는 만큼 그 결과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번 현물출자 유상증자는 오는 14일까지 제일약품 주주들을 대상으로 청약을 받는다.
현물출자 유상증자가 완료된 이후 2세 한승수 회장과 3세 한상철 사장의 지분율이 예상대로 최소 50.9%, 8.7%로 높아진다면 다음 수순은 2세에서 3세로 넘어가는 지분 승계가 될 전망이다.
이때 공익법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일약품은 한승수 회장이 이사로 있는 제일장학재단을 가지고 있지만 현재 계열사 주식은 없다. 하지만 70대에 접어든 한 회장이 현물출자 유상증자로 확보한 지주회사 주식 일부를 장학재단에 증여하거나 새로운 공익법인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 이 역시 주요 기업들의 경영 승계 과정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수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