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은 오프라인 유통업계에 '재앙'이었다. 봉쇄에 가까운 거리두기 조치가 내려지자 기존 영업 방식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 사이 이커머스가 유통 시장을 무섭게 잠식했다. 대형마트가 연이어 점포를 매각·철수하는 등 타격이 현실로 나타났다. 일각에서는 이커머스가 유통 시장을 장악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1년 만에 상황은 반전됐다. 오프라인 유통업계가 '역습'에 나선 것이다. 이를 통해 그들만의 영역을 새롭게 개척했다.
선두는 백화점이었다. 백화점은 코로나19 상황에도 공격적 출점을 이어갔다. 명품·패션 카테고리를 강화해 고객이 스스로 찾아오도록 만들었다. 대형마트와 편의점은 '차별화' 카드를 꺼내들었다. 각자의 전략에 맞춰 체험형 요소, 자체브랜드(PB)상품을 강화했다. 오프라인의 대안으로 떠오른 창고형 할인점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나아가 온·오프라인 시너지를 내기 위한 '밑그림'까지 그려냈다. 업계에서는 내년을 기점으로 온·오프라인의 경계가 흐려질 것으로 보고 있다.
고급스럽거나, 특이하거나
올해 오프라인 유통업계는 각자의 특성에 맞는 전략을 극대화했다. 백화점의 선택은 출점을 통한 시장 확대였다. 현대백화점이 연초 '더현대 서울'을 열었다. 이어 8월에는 롯데백화점 '동탄점'과 신세계 '대전 아트&사이언스점'이 문을 열었다. 탄탄한 명품·패션 수요를 겨냥해 시장을 확장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선택은 적중했다. 이들 점포 모두 개점 후 빠르게 시장에 자리잡았다. 현대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은 이에 힘입어 '역대급' 실적을 제출하기도 했다.
대형마트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이들은 시장 확대보다 점포 구조를 바꿨다. 이마트는 지난해 9곳에 이어 올해도 10여곳의 점포를 '체험형'으로 리뉴얼했다. 비효율 전문점은 숍인숍 형태로 바꿨다. 롯데마트도 연말 잠실점을 '제타플렉스'로 리뉴얼하며 반격에 나섰다. 체험 요소를 극대화한 이마트와 달리, 업계 선두권 상품 라인업을 갖춘 '메가 점포'를 구현했다. 출점이 어려운 편의점의 선택은 점포 경쟁력 강화였다. 우수한 자체브랜드(PB)상품을 쏟아내며 전면전을 펼쳤다.
창고형 할인점도 대세로 떠올랐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길어지면서 대량의 상품을 싸게 구매하는 트렌드가 정착하면서다. 코스트코는 지난해 역대 최대 실적을 쓴 데 이어 올해도 순항하고 있다. 트레이더스도 이마트의 지원 속에서 코스트코와 격차를 겹쳤다. 홈플러스는 이런 트렌드를 겨냥해 다수 점포를 창고형 할인점 형태의 '스페셜'로 리뉴얼했다. 롯데마트는 철수 위기였던 '빅마켓'을 다시 살리기로 했다. 코스트코·트레이더스와 겹치지 않는 상권으로 확장함을 통해서다.
'퀵커머스' 통한 온라인 영토 확장
내년 오프라인 유통 시장의 '관전 포인트'는 '퀵커머스'다. 퀵커머스는 지역 점포 등 소규모 물류 거점을 활용한 근거리 배송 서비스다. 퀵커머스 시장 선두는 편의점이다. GS리테일은 배달대행 서비스 '부릉' 운영사 메쉬코리아, 카카오모빌리티의 지분을 인수했다. 이를 통해 오토바이 배송 역량을 높였다. 요기요를 인수하면서 '플랫폼’도 갖췄다. CU·세븐일레븐·이마트24 등도 관련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이마트24는 최근 매물로 나온 미니스톱 인수를 통한 시장 기반 확대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형마트 역시 '당일배송'이라는 이름의 퀵커머스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온라인으로 들어온 고객 주문을, 직원이 장을 봐주는 형태의 매장 'P.P센터' 확대를 통해서다. 이마트는 최근 일일 3000건 주문을 처리할 수 있는 P.P센터를 경기도 이천에서 시범운영하기 시작했다. 이후 내년 중으로 이런 대형 P.P센터를 전국 30여곳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홈플러스·롯데마트도 각각 당일배송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고객 이목 사로잡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백화점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신세계·롯데는 통합 이커머스 플랫폼 SSG닷컴·롯데ON을 통한 배송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전문몰' 형태로 온라인 플랫폼을 리뉴얼했다. 식품은 현대식품관, 패션은 더한섬몰 등이 담당하는 방식이다. 대형마트가 없는 만큼 백화점 인근 상권에 집중한 소규모 배송 서비스를 강화하겠다는 구상이다. 백화점식 퀵커머스는 아직 사업 초기인 만큼 뚜렷한 성과는 없다. 다만 백화점에 대한 고객 신뢰도가 높은 만큼 미래 가치는 크다는 분석이 많다.
온·오프라인 벽 무너진다…출혈경쟁 개시
내년 오프라인 유통업계의 전략에 당장의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백화점은 명품과 코로나19 사태 완화에 힘입은 호조를 이어갈 것이라는 분석이다. 온라인 패션 플랫폼 캐치패션은 지난 22일 2022년 시장 전망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패션·잡화에 집중됐던 명품 트렌드가 내년 라이프스타일 전반으로 확산될 것으로 전망했다. 더불어 키즈 명품 시장 등 '변두리 시장'도 내년부터는 성장하기 시작할 것으로 봤다. 백화점은 이런 트렌드의 수혜를 가장 크게 입을 수 있다.
다만 장기적으로 퀵커머스를 통한 이커머스화(化)는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코로나19 이후 체험형 매장, PB상품이 매출과 브랜드 이미지 제고를 견인했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트렌드를 저격한 이슈성 전략에 가깝다. 더군다나 시장 상황 상 추가 출점도 쉽지 않다. 결국 안정적 성장을 위해서는 온·오프라인 전체 시장 규모를 키워야 한다. 백화점 역시 이런 구조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커머스와 '전면전'이 펼쳐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따라서 업계에서는 이커머스와 비슷한 출혈경쟁이 유통업계 전반으로 번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물론 오프라인 유통업체에게는 점포라는 차별화된 무기가 있다. 하지만 이커머스 시장에서는 후발주자다. 빠르게 많은 고객을 록인(Lock-in) 시켜 플랫폼의 규모 경쟁력을 높여야 경쟁할 수 있다. 마케팅·배송역량 강화 등에 대한 투자를 피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나아가 기존 점포를 물류망으로 활용하는 만큼 점포에 대한 투자도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올해 오프라인 유통업체들이 이커머스와의 경쟁에도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내며 '선방'한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행보를 보면 이커머스 시장에서도 전면전에 나서기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이미 주요 이커머스 플랫폼이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 이들의 파이를 빼앗으려면 천문학적 투자가 필요하다. 결국은 출혈경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