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패션업체들이 콧대 높은 유럽 시장 공략에 나섰다. 유럽은 전 세계 패션의 중심지지만, 인지도가 낮은 국내 업체들에는 불모지였다. 하지만 최근 한국 문화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국내 패션업체들이 유럽 시장 문을 두드리고 나선 것이다.
유럽서 선전하는 K-패션
업계에 따르면 삼성물산 패션의 글로벌 브랜드 '준지(JUUN.J)'는 지난 1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30% 증가했다. 현재 준지는 약 50개의 유럽지역 매장에 입점해 홀세일 비즈니스를 전개하고 있다.
준지는 패션 디자이너 정욱준이 론칭한 브랜드로 2012년 삼성물산이 인수했다. 이 회사는 해외 유통망을 확보하면서 유럽 시장 입지를 다져왔다. 지난 1월엔 프랑스 파리 아랍세계연구소에서 '23년 가을겨울 시즌 컬렉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LF의 캐주얼 브랜드 '던스트'도 성장하고 있다. 던스트의 운영사이자 LF 자회사 씨티닷츠의 작년 매출은 2021년 대비 2배 이상 증가했다.
던스트는 이탈리아 밀라노 소재 백화점 리나센테, 스위스 백화점 본제리그리더 등 해외 10여개국 유통플랫폼에 입점했다. 최근엔 블랙핑크 지수를 공식 앰버서더로 선정했다. 유럽, 북미 등 글로벌 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다.
LF 관계자는 "던스트는 최근 글로벌 유통 바이어들과 입점·수출 논의를 진행 중"이라며 "론칭 2년만 흑자 전환에 성공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패션업체들이 유럽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K문화가 글로벌 영향력을 확대하면서다. 정체기에 접어든 국내 패션시장의 돌파구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기 적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에 따르면 작년 국내 패션시장은 45조7787억원으로 전년 대비 5.2% 성장했다. 국내 패션시장은 2006년~2010년까지 평균 두 자릿수 성장률을 보이다가 2011년부터 1~4%대로 쪼그라들었다. 이후 2019년(-3.6%), 2020년(-3.2%) 감소했다가 최근 일부 소폭 회복세를 보인 것이다.
"인지도 낮고 유통망 확보 어려워"
국내 패션업체는 그간 유럽 시장 문을 꾸준히 두드려왔다. 하지만 유럽 시장은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올해 1월 패션중심지 프랑스 마레 지구 프랑 부르주아에서 시스템·시스템옴므 단독 프레젠테이션을 연 현대백화점그룹의 한섬은 2013년부터 프랑스에 공을 들이고 있다. 2013년 프랑스법인을 설립하고 2014년부터는 마레지구에 '톰 그레이하운드 파리' 편집매장을 론칭했다. 회사 관계자는 "톰 그레이하운드 파리을 통해 해외 패션 트렌드를 수집하고 현지 바이어와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적은 좋지 않았다. 작년 한섬 프랑스법인 매출은 22억원으로 전년대비 14.3% 늘었지만, 당기순손실은 8억원으로 작년(4억원) 보다 약 2배 늘었다. 프랑스법인은 설립 이후 손실만 거듭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프랑스법인은 파리 현지 매장 매출만 잡힌다"면서 "브랜드 수출 매출은 오히려 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LF는 2011년 이탈리아 법인, 2013년엔 프랑스 법인을 차례로 설립했다. LF 헤지스는 파리의 유명 편집숍 '꼴레뜨'에 입점하면서 브랜드 인지도를 쌓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 시장의 진입장벽은 높았다. LF는 2016년 프랑스법인을 철수했다. 이탈리아 법인(폴라리스 S.R.L)은 2019년부터 완전자본잠식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작년 이탈리아 법인 순손실액은 8억원을 기록했다.
실적 부진의 이유는 국내 브랜드가 중저가 중심으로 구성됐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럭셔리와 저가형 제조·직매형의류(SPA)브랜드가 글로벌시장을 장악한 가운데 국내 업체들이 들어설 자리가 마땅치 않은 것이다. 최근 우후죽순 늘고 있는 글로벌 준명품 브랜드들과 경쟁도 치열하다.
현지 유통망 확보도 숙제다. 국내 업체들은 현지 유통채널에 자사 브랜드를 입점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키우고 있다. 운영비가 높은 직영점은 현지 브랜드 보다 경쟁 우위를 갖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브랜드의 인지도가 낮아 백화점, 아울렛 등을 뚫기도 쉽지 않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아무래도 국내 브랜드 역사가 짧고 북미와 유럽 시장에는 해외 럭셔리 브랜드와 SPA 브랜드 위주로 지속 성장하고 있는 모습"이라며 "국내업체들은 중저가 브랜드 위주로 성장한 탓에 포지션이 애매한데다 가격경쟁력도 높지 않아 사업확대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 문화가 전세계에 보급되면서 언어적으로도 비즈니스가 수월해진 면이 있다"면서 "아직 성공사례는 많지 않지만 국내 브랜드가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고무적인 환경이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