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을 향한 정부의 팔 비틀기가 반복되고 있다. '지나친 이자장사' '은행 종 노릇' 등 강도높은 비판 후 은행들은 상생금융 규모 확대, 지난해 말 민생금융 지원방안을 내놓은데 이어 맞춤형 기업금융 지원 방안에서도 상당 몫을 떠안았다.
은행권에선 이번 방안에 대한 취지는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반복되는 금융권에 대한 지원 요구는 대내외 신인도 하락 뿐 아니라 기업가치와 성장성 제고에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게다가 경기 악하로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리스크관리가 더욱 중요해진 시점에서 '신성장·신산업'이란 이유로 금융지원을 하는데 대한 부담도 크다.
기업금융 4분의1 이상 시중은행 몫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맞춤형 기업금융 지원방안'은 총 76조원 규모다. 규모에 상관없이 첨단산업을 영위하는 기업에 20조원, 중견기업과 중소기업에 각각 15조원과 40조6000억원 등을 집중 투입한다. ▷관련기사: 이번엔 '기업 살리기' 금융지원 76조…5대 은행 몫 20조원(2월15일)
이 가운데 시중 5대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은 우대금리 제공과 자금 출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약 20조원을 책임진다. 전체 지원방안의 26.7% 수준이다.
우선 시중은행은 신성장 분야로 신규진출 하거나 투자 확대를 원하는 중견기업에 전용 저금리 대출프로그램을 마련한다. 5대 은행이 각 1조원, KDB산업은행 1조원 등 총 6조원 규모다. 기업의 설비투자와 연구개발 자금, 운영자금 등 업체 당 최대 1500억원까지 1%포인트 금리를 우대해 대출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산 준비를 거쳐 4월1일 상품을 출시한다는 계획이다.
이번에 처음 조성하는 중견기업 전용펀드에도 자금을 출연한다. 각 은행별 최대 출자규모는 5000억원이다.
신산업에 진출하는 중소기업에 금리우대 혜택도 제공한다. 프로그램별로 최대 1%포인트의 금리를 감면하는 내용으로 5대 은행이 각 1조원씩 지원한다. 여기에 5대 은행이 1000억원을 신용보증기금(신보)에 출연하고, 신보는 이를 재원으로 1조5000억원 규모의 기업 성장단계별 보증지원을 추가한다.
매출하락 등으로 이자부담이 매우 크지만 영업이익은 발생하는 정상영업 영위 중소기업에 대해서도 5대 은행이 총 2조원 규모의 금리인하 특별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대상 기업이 보유한 대출금리 5%를 초과한 대출에 대해선 1년간 금리를 5%까지 감면(최대 2%포인트 한도)해주는 방식이다.
이와 함께 유동성 부족기업의 정상 기업화, 재창업 지원 등에도 시중은행이 참여할 전망이다.
상생 확대→이자환급→기업금융 지원까지
은행권은 지난해부터 기업금융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가계부채 빨간불이 켜지면서 금융당국이 대출 규제를 강화했고 은행들도 가계대출 영업을 확대하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에 기업금융으로 눈을 돌렸고, 올해부터 본격적인 경쟁이 이뤄질 것이라는 게 금융권 분석이다. ▷관련기사: '잘 봐! 기업금융 싸움이야 ' 하나은행 1승에 리딩뱅크 수성도(2월14일), '기업금융 명가 재건' 선언한 우리은행 "4년뒤 1위로"(23년 9월7일)
금융당국 역시 은행들이 적극 참여했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금융위 관계자는 "은행권이 중견·중소기업의 어려운 상황에 적극적으로 지원 의사를 표현했다"며 "큰 틀에서 은행들이 많은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모두발언에서 "이번 대책에 적극 참여해준 5대 은행장에 감사를 드린다"라며 "은행들이 기존 주담대 위주 소비자금융에서 벗어나 기업에 대한 지원을 넓혀가는 노력이 필요하고 기업발전에 큰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해도 은행을 향한 정부의 팔 비틀기가 반복되고 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 동안 은행들이 급증한 대출자산과 금리 상승을 바탕으로 가파른 이자이익 성장을 이어가자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금융당국 수장들은 은행권을 압박했다.
이에 5대 시중은행은 지난해 상반기 금리인하 등을 포함한 8000억원 규모의 상생금융 방안을 마련했다. 또 지난해 하반기 윤 대통령의 '은행 종노릇' 발언 이후에는 국내 21곳 전 은행이 참여한 2조1000억원 규모의 '민생금융 지원방안'을 마련했다.
이 가운데 1조6000억원은 개인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에 대한 이자환급 프로그램이다. 시중은행은 이자환급에 대한 비용을 지난해 4분기 실적에 반영했고, KB금융을 제외한 상장 금융지주들은 역성장하는 등 부진을 면치 못했다. 이번 맞춤형 기업금융 지원을 두고도 은행권에서 부담을 느끼는 이유다.
더욱이 신성장·신사업 분야가 당장에 성과가 나오기 어렵고 리스크 또한 높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은행 입장에선 신중할 수밖에 없다.
한 은행 관계자는 "중소기업은 부실이 많은데 대출을 확대하고 우대금리를 제공하면 은행 수익과 건전성 부분에 대한 부담이 생긴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중소·중견기업이 살아야 우리 경제가 안정되고 은행 입장에서도 수익 기반이 탄탄해지는 만큼 지원방안 취지는 공감한다"면서도 "지원방안 가운데 우대금리 제공, 출연금 등은 비용과 은행 수익성 등에 부담을 주는 방안인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은행의 이익이 늘자 금융당국이 다양한 명목으로 환원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은 해외 투자자 등 대내외 신인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며 "최근 이슈가 된 기업 밸류업과 미래 성장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