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타이어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제품입니다. 소비자들도 소모품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동차 산업에서 타이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큽니다. 바로 자동차의 '발'이기 때문입니다.
수년 전 한 해외 모터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멋진 디자인의 자동차들이 빼곡히 들어찬 전시장 한 구석에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해 사람들을 비집고 찾아간 그곳에는 해외 유명 메이커의 타이어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관람객들이 홍보 담당자의 말에 귀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짧은 영어 실력 탓에 홍보담당자가 어떤 말을 하는지 자세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뚜렷하게 들리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효성'이었습니다.
그 담당자는 '효성'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습니다. 궁금했습니다. 곁에 있는 통역에게 내용을 좀 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통역이 전해준 말은 "이 타이어에는 세계 1위 제품인 효성의 타이어코드가 들어가 있다. 여기에 우리만의 디자인과 기술력을 가미했다. 그런만큼 품질은 자신한다" 였습니다.
세계 타이어코드 시장을 석권한 효성이 요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갑자기 악화된 재무상황 때문입니다.
효성은 금융당국이 지정한 '관리 대상 계열'에 포함됐습니다. '관리 대상 계열'은 재무구조 개선 약정 체결 대상보다는 한단계 아래급입니다. 금융위원회가 올해부터 약정 체결 가능성이 높은 기업에 대해 사전 감시 강화를 목적으로 새롭게 마련한 제도입니다. 금융당국이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는 시그널을 주는 겁니다.
'관리 대상 계열'로 선정된 기업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각종 자금 집행이 어려워집니다. 일일이 주채권은행과 상의해야 합니다.
효성의 재무 상황이 급격히 나빠진 것은 작년에 있었던 국세청의 추징금 때문입니다. 국세청은 작년 효성에 대해 고강도 세무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총 3650억원의 추징금을 부과했습니다. 이는 효성의 재무 구조를 한꺼번에 무너뜨렸습니다.
효성의 재무지표는 작년 상반기까지는 좋은 흐름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국세청의 추징금 부과로 효성은 작년에 2362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습니다. 추징금만 없었다면 1300억원대의 이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추징금 납부로 효성의 부채비율은 급증했습니다. 지난 2011년 효성의 부채비율은 294.6%, 2012년에는 284.9%였습니다. 하지만 작년에는 408%로 늘었습니다. 이 때문에 '관리 대상 계열'에 포함된거죠.
효성의 지난 1분기 실적은 '선방'한 수준이었습니다. 매출은 소폭 감소했지만 영업이익은 4.4% 가량 증가했습니다. 다만, 당기순손실은 적자폭이 확대됐습니다. 효성측은 1분기가 비수기이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만일 2분기에도 괄목할만한 실적 개선을 거두지 못하면 효성은 '관리 대상 계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실적 개선을 위해서는 투자가 절실하다는 점입니다.
'관리 대상 계열'로 지정된 기업들은 매년 8월~9월에 금융당국으로부터 '검사'를 받습니다. 재무구조개선이라는 숙제를 얼마나 했느냐 검사하는 겁니다. 효성도 조만간 상반기 실적을 바탕으로 검사를 받습니다. 3년간 '관리 대상 계열'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주채무계열 약정을 맺어야 합니다.
효성은 세계 일류제품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습니다. 일반 소비자들은 잘 알지 못하는 품목들입니다만 화학과 섬유, 소재 분야에서 효성의 기술력은 세계적입니다. 타이어코드, 스판덱스, 자동차 시트 벨트 원사 등은 세계시장 점유율이 50%에 가깝습니다.
▲ 효성은 총 9개의 세계 일류 상품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 타이어 코드와 스판덱스 등은 세계 시장 점유율이 50%에 육박할 정도로 독보적인 기술력을 자랑한다. |
하지만 최근들어 중국을 비롯한 경쟁업체들의 추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중국 업체들의 도전은 이미 현실이 됐습니다. 이를 뿌리치기 위해서는 투자가 급선무입니다.
효성의 올해 총 6040억원을 투자할 예정입니다. 대부분 폴리케톤과 탄소섬유 등 신소재 개발과 시장 개척에 사용될 예정입니다. 효성은 아무리 어려워도 투자를 진행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관리 대상 계열'이라는 족쇄를 차고 있는 이상 6000억원이 넘는 투자는 무리입니다. 주채권은행에서 이런 대규모 투자를 달가워할 리 만무합니다. 효성이 가슴을 치는 이유입니다.
효성이 국세청으로부터 세금을 추징받은 것은 분식회계를 통한 법인세 탈루 때문입니다. 효성은 지난 97년 외환위기 당시 해외 사업에서 약 1조원 가량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를 메우기 위해 분식 회계를 했고 법인세를 탈루했습니다. 분명 잘못한 일입니다. 다만 경영 실패가 아닌 다른 이유로 족쇄를 찼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금융당국의 '관리 대상 계열' 지정은 부실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좋은 취지입니다. 하지만 효성의 사례를 보면 금융당국이 각 기업이 처한 현실은 외면한 채 너무 숫자에만 매몰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기업의 부채비율이 일시적으로 급등했다면 그 기업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내용은 무엇인지, 단기적으로 극복이 가능한 사안인지 여부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악성인지 양성인지 판단한 후 메스를 대도 늦지 않습니다.
효성의 경우 세계 일류 상품을 기반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내고 있습니다. 신시장 개척을 위해 탄소섬유와 신소재 개발에도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추징금이라는 암초만 없었다면 순항했을 겁니다.
금융당국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기업의 상황과 변화를 디테일하게 살피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식 규제는 오히려 창조경제를 해치는 악성 종양이 되지 않을까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의 침대'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아테네 교외의 케피소스 강가에 살면서 그 앞을 지나가는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유인, 쇠로 만든 침대에 눕히고는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이고 길면 잘라 버리는 방법으로 죽였다. 흔히 자기가 세운 일방적인 기준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기준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것을 빗대는 말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