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자동차의 기대가 무너졌다. 통상임금을 둘러싼 소송에서 법원이 노동조합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법원은 31일 통상임금 소송 1심 판결에서 정기상여금과 중식비 등 일부가 통상임금으로 인정된다며 지난 3년간 밀린 임금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총 4223억원이다.
법원은 특히 과거 소급분 지급시 '경영상 중대한 어려움'이 예상된다며 기아차가 주장한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도 인정하지 않았다.
◇ 신의칙이란
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성실의 원칙'은 지난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통상임금의 요건을 규정하며 예외적으로 제시한 내용이다.
당시 대법원은 회사가 근로자들에게 지급한 상여금이 정기성, 일률성, 고정성 등 3대 요건을 갖추고 있다면 이를 통상임금으로 봐야 한다고 규정했다. 다만 ① 노사가 동의 하에 상여금의 통상임금 제외를 합의했고 ② 소급분을 지급할 경우 회사 경영에 중대한 어려움이 예상된다면 이를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신의성실의 원칙'이다.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에 대해선 ① 실질 임금인상률이 교섭당시 예정한 인상률을 훨씬 초과하고 ② 예상치 못한 과도한 지출이 예상되며 ③ 순이익의 대부분을 추가 지급해야 하는 사정 등을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라고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이후 나온 판결에서 '신의칙'을 적용하는 기준은 일관되지 못했다. 아시아나항공이나 현대중공업, 동원금속, 현대로템 등의 소송에서도 사안별로 신의칙 인정여부를 다르게 결정했다. 경영상 중대한 어려움에 대한 판단을 객관적으로 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아차는 그동안 상여금이 통상임금으로 인정된다고 해도 소급분 지급으로 인해 경영상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강조해왔다. 최근 자동차업계의 경쟁이 극심해지며 기아차 역시 고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규모 자금이 일시에 지급된다면 감당하기 어렵다는 취지였다.
◇ 법원 "경영상 어려움, 단정 어렵다"
하지만 이날 법원은 기아차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과거 소급분이 지급된다고 해도 기아차의 경영에 중대한 위협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셈이다.
법원은 판결에서 우선 소급분 지급이 기아차에게 예측하지 못한 재정적 부담을 주는 부분은 인정했다.
하지만 지난 2008년부터 2015년까지 매년 당기순이익을 기록해왔고, 그동안 누적된 이익규모가 상당한 만큼 판결에 따른 소급분이 지급된다고 해도 경영상 중대한 어려움이 초래되거나 기업 존립이 위태롭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봤다.
재판부는 "근로자들이 받았어야 할 임금을 이제야 지급하는 것을 두고, 비용이 추가적으로 지출된다는 점에만 주목해 이를 경제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취지를 내놨다.
불확실한 미래를 근거로 과거에 이뤄졌어야 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서는 안된다는 의미다. 또 근로자들이 회사의 중대한 어려움이나 기업 존립의 위태라는 결과가 발생하도록 방관하지는 않을 것으로 봤다.
물론 이번 판결이 1심인 만큼 항소심 등을 통해 '신의칙' 적용 여부가 달라질 가능성은 남아있다. 다만 다른 사례에서도 신의칙 인정 여부를 둘러싼 혼란은 당분간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다.
이에따라 이번 기아차 판결을 시작으로 통상임금의 범위, 신의칙 적용 기준 등에 대한 보다 명확한 기준을 위해 입법조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더 커질 것이란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