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그룹이 삼성에서 나와 재계 순위에 처음 이름 올린 건 1999년이다. 지금까지 20년 동안 걸어온 길을 보면 회사의 성장과 함께 승계 작업에 대한 고민도 그대로 묻어있다.
처음 10년은 이재현 회장의 불안한 경영권을 공고하게 다지는 2세대 승계 작업에 집중했고, 이후 지금까지 10년은 이 회장의 장남 이선호(28)로 이어지는 3세대 승계를 위한 물밑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 이재현 회장, ㈜CJ 지분을 어떻게 늘려왔나
CJ그룹은 80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지만 승계의 핵심은 지주회사 ㈜CJ이다. 이재현 회장이 ㈜CJ의 단일 최대주주이고, 이 회사 밑으로 계열사들이 포진해있다.
이재현 회장은 1993년 삼성에서 독립하던 시기 이 회사의 지분이 없었다. 지분 승계는 이 회장의 모친 손복남 고문이 가지고 있던 삼성화재 지분 18%에서 출발했다. 손 고문은 1994년 삼성화재 지분을 팔고 ㈜CJ(당시 제일제당) 지분을 확보한 뒤 곧바로 장남 이재현 회장에게 모두 증여했다.
이후 이 회장은 모친에게 물려받은 지분 외에 신주인수권 행사와 유·무상증자, 주식 배당을 더해 1999년 말 526만3184주(24.05%)를 확보했다. 삼성에서 독립한 후 짧은 기간에 속도감 있게 지분을 확보했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 회장은 이후에도 자신이 주주로 있던 CJ모닝웰과 CJ엔터테인먼트가 2006년 ㈜CJ와 합병하는 과정에서 추가로 합병신주를 받아 주식 수를 늘렸다.
이 회장의 ㈜CJ 지분 확보 과정의 정점은 2007년 지주회사 전환이었다. ㈜CJ가 지주회사로 전환하기 직전 그는 598만 주(19.62%)를 가지고 있었다. 이 주식은 기업분할로 ㈜CJ 377만2414주와 CJ제일제당 주식 221만5545주로 쪼개졌다. 이후 이 회장은 CJ제일제당 주식을 모두 ㈜CJ에 현물로 출자하고, 그 대가로 1주당 약 3.8주의 ㈜CJ 주식을 받아 단숨에 보유지분을 1193만7813주(49.79%)로 늘렸다.
당시 ㈜CJ가 현물출자에 참여한 CJ제일제당 주주들에게 발행한 신주가 총 832만8090주였는데 이재현 회장이 이 가운데 98%(816만5399주)를 집중적으로 챙겼다. 개인 지분율도 당연히 월등히 높아졌다.
이로써 이 회장은 삼성을 나와 독립 경영을 시작할 때 단 한주도 없었던 ㈜CJ 주식을 10여년 만에 절반가량 확보하면서 탄탄한 지배력을 구축했다.
현재 이재현 회장의 ㈜CJ 지분율 42%이다. LG나 GS, 두산처럼 대가족 지분이 뒤를 받쳐주는 구조가 아닌 '원톱'형 지분구조이긴 하지만 다른 그룹 총수보다 상대적으로 높다.
최태원 회장은 ㈜SK를 23.4%, 조양호 회장은 한진칼을 17.84%, 김승연 회장은 ㈜한화를 22.6% 가지고 있다. 이 회장의 ㈜CJ 지분율 42%는 이론적으로 증여세로 절반을 물납해도 20% 이상을 후대에 물려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만큼 필사적으로 지분율 확대에 신경써왔다는 분위기를 느낄수 있다.
물론 다른 밑작업도 차근차근 준비했다.
◇ 위기 때 등장한 '장남 올리브영 대주주' 만들기 프로젝트
이재현 회장은 ㈜CJ 지분을 본격적으로 늘리기 직전 2006년 자본금 190억원 규모의 씨앤아이레저산업이란 회사를 만들었다. 자신이 80억원(지분 42.11%)을 출자하고, 장남 이선호 씨(당시 16살), 장녀 이경후 씨(당시 21살)도 각각 72억원(37.89%), 38억원(20%)을 출자했다. 당시 10대와 20대 초반이던 이 회장의 자녀가 무슨 돈으로 거액의 투자금을 마련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장남 선호 씨는 20살이 되던 2010년 또 한 번 수십억원을 들여 계열사 지분을 사들였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CJ파워캐스트 지분 24%를 74억원에 취득한 것이다. 누나 경후 씨도 37억원에 아버지 지분 12%를 사들였다. 이번에도 두 남매의 지분 취득 비율은 7(이선호):3(이경후)이었다. 역시 자금출처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렵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CJ 비자금 문제가 터졌다. 이 회장의 개인 자금을 관리하던 재무팀장이 자금을 유용하다가 조직폭력배의 협박에 돈을 뜯기자 살인을 교사한 사건이다. 사건의 파장은 다행히 이재현 회장일가까지 미치지 않았고 조용히 잊히는 듯했다.
그러나 3년 뒤 2013년 복병을 만났다. 그해 5월 검찰은 CJ그룹이 해외법인을 통해 수천억원 상당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세금을 탈루한 혐의를 포착, CJ 본사와 이 회장 자택을 압수수색하고 자금관리인을 체포했다. 단서를 잡은 검찰은 곧이어 이 회장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조세포탈,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이 회장이 구속되기 일주일 전 장남 선호 씨가 CJ그룹 사원으로 입사했다. 미국 컬럼비아대 유학시절에서도 방학기간에 틈틈이 계열사 인턴으로 근무한 적은 있지만 아버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시기에 정식으로 승계코스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후 이 회장은 2015년까지 이어진 1심과 항소심 파기환송심에서 모두 유죄를 받았다. 이 회장이 회사보다 법정에 더 많이 있던 시기였지만 장남을 위한 승계 물밑작업은 빈틈없이 이뤄졌다. 승계의 지렛대로 선택받은 회사는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장품·미용용품 복합매장 올리브영이었다. 장남 선호 씨를 이 회사의 대주주로 앉히기 위한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먼저 이 회장은 1심과 항소심에서 유죄를 받은 2014년 말 자신의 CJ시스템즈 지분 중 15.9%를 장남에게 증여했다. 증여한 다음 날이 CJ시스템즈가 올리브영과 법적으로 합병을 마무리하는 날(합병기일)이었다. 장남 선호 씨는 주식을 물려받은 지 하루 만에 두 회사를 합친 CJ올리브네트웍스의 지분 11.3%를 보유한 주요주주가 됐다.
이 회장은 또 파기환송심에서도 최종 유죄를 받은 2015년 말 남아있던 CJ올리브네트웍스 지분을 추가로 증여했고, 장남의 지분율은 15.84%로 높아졌다. 지분 증여가 마무리되자 다음 수순은 회사의 덩치 키우기였다. 선호 씨가 20살 때 아버지로부터 취득한 CJ파워캐스트가 합병 대상으로 선택받았다. 이미 주식을 가지고 있던 회사와 합치자 합병 후 선호 씨의 CJ올리브트네웍스 지분율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17.97%로 높아졌다.
이재현 회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가진 씨앤아이레져산업도 증여했다. 선호 씨는 13.11%를 물려받아 회사 설립 때부터 보유하고 있던 지분을 포함 총 51%를 확보하며 대주주가 됐다.
◇ 승계의 지렛대 역할 맡을 CJ올리브네트웍스
CJ그룹 CJE&M 계열 케이블채널 tvn의 드라마는 통상 16부작이다.
CJ그룹 승계 과정을 드라마에 빗대어보면 이 회장이 불안한 지배력을 강화하던 시기는 초반 4부작, 장남으로 승계 물밑작업을 진행하던 시기는 중반부로 접어드는 4부작 정도에 비유할 수 있다. 특히 이 기간 이 회장이 조세포탈·횡령·배임으로 구속되고, 건강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승계 작업의 속도가 빨라졌다.
이제 CJ의 승계과정은 반환점을 돌아 종반부의 서막에 접어들고 있다. 아직 결말은 알 수 없다.
장남 선호 씨는 지주회사 ㈜CJ 지분이 없다. 자신이 대주주인 CJ올리브네트웍스와 씨앤아이레저산업도 지주회사 ㈜CJ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러나 아버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빠르게 이뤄졌던 CJ올리브네트웍스와 씨앤아이레저산업 대주주 만들기 프로젝트가 앞으로 승계 과정에서 핵심 지렛대 노릇을 할 것으로 보인다.
CJ올리브네트웍스를 승계 지렛대로 활용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예측할 수 있다.
이 회사를 주식시장에 상장시키는 과정에서 구주매출(기존주주가 주식을 내다 파는 것)로 현금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이 돈으로 아버지가 가진 ㈜CJ 지분을 물려받을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대기업 승계과정을 보면 이런 절차를 밟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미 아버지가 가진 주식을 물려받으며 증여세를 냈는데 증여세를 한 번 더 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CJ올리브네트웍스가 ㈜CJ와 직접 합병하거나 상장 후 몸집을 더 키워서 CJ와 합병할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하면 선호 씨는 CJ 주주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두 회사 간 체급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아직은 쉽지 않지만 덩치를 더 키운다면 현대차그룹이 선택한 분할·합병과 같은 다양한 카드가 대기하고 있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월급을 받는 전문가집단이 대기업 안팎에는 널려있다.
CJ그룹 인사의 최종결재권자인 이재현 회장은 수년간 CJ올리브네트웍스에 실세 전문경영인을 파견했다. 우선 장남 대주주 만들기 프로젝트가 진행되던 2014~ 2015년에는 ㈜CJ 경영총괄을 맡았던 허민회 대표를 보냈다.
최근 발표한 그룹 인사에선 ㈜CJ 전략실장을 지낸 구창근 CJ푸드빌 대표이사를 CJ올리브네트웍스로 이동시켰다. 전체 계열사를 놓고 봤을 때 눈에 띄는 포지션이라고 할 수 없는 CJ올리브네트웍스에 핵심 인사들을 보낸 이유는 앞으로 승계의 지렛대로 활용하는데 필요한 중간계투나 구원투수 역할도 함께 주문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 커진 CJ, 이선호는 무엇으로 능력을 입증하나
CJ그룹이 재계 순위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99년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그해 4월 발표한 대기업명단의 스물여덟 번째 자리에 제일제당(2002년 CJ로 변경)이란 이름이 올라왔다. 1993년부터 시작한 삼성과의 분가(分家) 작업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한 당시 계열사가 15개, 자산총액 2조7000억원이었다.
20년이 흐른 올해 CJ는 대기업 순위 12위(민영화된 공기업 제외)로 올랐고, 계열사 80개에 자산총액 28조3000억원의 집단으로 성장했다. 물론 같은 기간 삼성은 국내 최대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CJ의 성장 속도도 삼성 못지않았다. 20년 전 재계 순위에 등장했을 때 자산 규모는 삼성의 23분의 1이었으나 지금은 14분의 1로 좁혀졌다.
커진 회사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건 부모로서 기쁜 일이겠으나 그만큼 부담과 책임이 뒤따른다.
일단 돈이 많이 든다. 정상적으로 상속·증여세를 내면서 안정적으로 지분을 승계해주긴 쉽지 않다. 그래서 예전엔 편법이나 탈법적인 방법도 많이 동원했지만 지금은 여론과 규제 당국의 감시망이 더욱 촘촘해지고 있다.
CJ의 승계 드라마는 그동안 제대로 된 자금출저 증빙이 없었다. 애초 출발점부터 그랬다. 손복남 고문이 어떻게 삼성화재 지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재현 회장은 무슨 재원으로 증여세를 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이 회장은 조세포탈과 횡령으로 기나긴 법정 싸움을 했고, 그의 장남은 10대부터 28살인 지금까지 계열사 주식을 사들이고 물려받는데 수백억원을 쓰고 있다.
무엇보다 CJ그룹 승계 드라마가 진정한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위해선 후계자가 탄탄한 경영 능력을 증명하고 실천해야 한다. 수많은 사람의 밥줄이 달린 대기업이 어설픈 승계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은 드라마가 아닌 우리나라 기업 역사가 보여주는 논픽션이다.
이 회장의 장남 선호 씨는 지금 28살의 나이에 부장 직함을 달고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다른 대기업의 후계 승계 과정에 비춰볼 때 현재의 직함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임원 승진을 하고 CEO가 되는 것도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경영 능력까지 무조건 키워주진 않는다. 그가 경영 능력을 무엇으로 어떻게 입증해나갈지가 진정한 CJ 승계 드라마의 후반부 스토리여야 한다는 평가다. 단순히 장남이 핵심 회사의 대주주가 되는 것 만으로는 그들만의 해피엔딩일 뿐이란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