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업계 종사자를 두고 흔히들 '연봉왕'이라 부른다. 억대 연봉을 주는 업체 목록에 정유사들이 매년 빼곡이 이름을 올리기 때문이다.
지난 2017년 기준 매출 상위 30대 기업 가운데 SK에너지(평균 1억5200만원) 직원들이 가장 많은 연봉을 받았다. S-OIL(1억2000만원)이 2위, SK이노베이션(1억1100만원)이 4위, GS칼텍스(1억800만원)가 5위로 그 뒤를 따랐다. 삼성전자(1억1700만원)는 3위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지금은 억대 연봉 목록에서 찾아보기 힘든 액화석유가스(LPG) 공급업체를 다니는 직원들이 정유업계 종사자보다 더 두둑한 월급봉투를 받았던 시절이 있다. 2004년 SK가스(6700만원)와 E1(6501만원) 직원들이 받았던 연봉은 SK이노베이션 전신 SK(6428만원) 본사 재직자들보다 연간 73만~272만원 더 많았다.
정유업체와 LPG 업체의 연봉 지급액 순위가 뒤집힌 이유는 뭘까.
◇ 정책에 웃고 울고
2000년대는 LPG 공급업체가 소위 '잘 나가는 시절'이었다. 1995년 정부의 LPG 차량 규제완화로 LPG용 7인승 승합차를 일반인도 구매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에 기아의 LPG 자동차 라인업인 카렌스, 카니발, 카스타로 구성된 '쓰리카' 라인업 중심 다목적차량(RV)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LPG 연료를 쓰는 고객들이 많아지니 LPG 충전소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이를 공급하는 업체 실적은 좋아지는 선순환 구조였다. 자연히 업계 종사자들이 받는 연봉도 올랐다.
하지만 LPG 공급업체들의 봄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부가 2005년부터 경유 승용차 판매를 허용하며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한 결과다. 여기에 이명박 정부가 2009년부터 '클린디젤' 정책으로 경유차를 적극 밀어주면서 LPG차가 발 디딜 공간이 줄었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수송분야에서 LPG 소비량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6년 36.6%로 정점을 찍은 뒤 매년 하락해 지난해 17.82%로 쪼그라들었다.
LPG 업계 수익은 가정용, 산업용, 수송용 수요가 3대 축이다. 이 가운데 가장 비중이 큰 수송용에서 밀리자 업계입지도 축소됐다.
SK가스와 E1 실적도 타격을 받았다. 최근 두 회사는 매출 증가폭에 비해 영업을 잘해서 벌어들인 영업이익 증가폭이 둔화됐다. 덩치가 커졌지만 알맹이를 챙기지 못한 셈이다.
이 때문에 정부의 규제완화에 LPG 업체들은 그야말로 쌍수 들고 환영하는 상황이다. 모든 LPG 차종에 대한 규제완화 법안이 지난 9일 국무회의 통과 이후 13일 국회 본회의를 속전속결로 통과했다. 택시, 렌터카, 장애인, 국가유공자, 7인승 다목적 차량, 경차에 국한됐던 LPG 차량의 문호가 활짝 열렸다. 사회적 이슈로 부상한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해서다.
LPG는 연소됐을 때 다른 정유 제품과 비교해 미세먼지를 유발하는 질소산화물(NOx) 배출량이 낮다. 환경부에 따르면 LPG 차량이 1㎞를 달릴 때 배출하는 NOx는 0.14g으로 경유차(1.1g), 휘발유차(0.18g)보다 최대 87.3% 적다. LPG가 정유제품 가운데 불순물이 가장 적기 때문이다.
SK가스 관계자는 "당초 거론된 2000cc 미만 소형 차량 뿐만 모든 차량 규제가 완화됐다"며 "LPG 공급사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넘어야 할 '산' 남아
다만 LPG 업계는 마냥 기뻐하지만은 않는다. 여전히 풀어야 할 실타래가 남았기 때문이다.
우선 소비자들의 선택폭이 좁다. 현재 판매 중인 LPG 차량은 승용차로는 K7, K5, SM7, SM6 등 10종에 불과하다. 연비가 휘발유, 경유차에 비해 낮은 것도 소비자들을 끌어당기기엔 어렵다는 분석이다. 기아차가 2017년 출시한 K7 모델의 경우 경유차는 리터당 14.4㎞, 휘발유차는 11㎞, LPG차는 7.4㎞를 달릴 수 있다.
규제완화 효과가 금세 나타나기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LPG 자동차는 2011년부터 폐차 수가 신규 등록 차량을 넘어서 전체 등록대수가 꾸준히 감소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이번 규제완화로 인해 2025년 LPG 차량 등록대수가 239만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는데, 이는 10년 전 달성한 기록을 재등반하는 수준에 그친다.
LPG협회 관계자는 "일반 승용차는 렌터카나 장애인용 차량을 그대로 일반인에게 판매하면 된다. 다만 LPG 기술이 적용되지 않은 대형 차량들은 기술개발을 통해 출시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