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와 임직원들에게 진정한 리더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이병철 손자나 이건희 아들이 아닌 선대 못지 않은 기업인으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2017년 12월27일 항소심 결심공판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의 수출규제를 풀기 위해 지난 7일 일본으로 향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출장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다.
이 부회장은 10일 청와대가 주최한 간담회를 거르면서까지 일본 현지에 머물며 정관계·산업·금융분야 인사들을 만나 해법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한일 양국간 외교문제로 불거진 사안이라 기업인이 해법을 도출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핵심소재에 대한 규제완화나 우회수입 등 대책을 가져올 경우 구원투수로서 이 부회장의 존재감이 한층 힘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재벌 3세'가 아닌 '진정한 리더'로 인정받고 싶어하던 이 부회장은 스스로를 시험대에 올려놓은 셈이다.
재계 1위 '역할론' 자임
세대교체·차세대 먹거리 주도
재계에서 이 부회장이 차지하는 위상은 지난달 26일 1박2일 일정으로 방한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삼성·현대차·SK·LG·롯데 등 5대그룹 총수들의 회동을 주선한 것에서 정점을 이뤘다.
이 부회장은 사우디의 경제·사회 개혁 전략인 '비전 2030'을 위한 한국 기업의 투자와 협력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날 회동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5대 그룹 총수끼리 따로 만난 첫 회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장소도 이건희 회장이 집무실로 쓰던 승지원이 사용됐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재계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평가했다.
일주일 가량 지난 이달 4일에는 서울 성북동 한국가구박물관에서 이 부회장이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재일교포 3세인 손 회장은 전세계 IT기업에 투자하기 위해 100조원 규모의 펀드를 운영하는 인물이다. 이 부회장은 손 회장과 함께 차에서 내려 둘 사이의 친밀감을 과시했다.
이 만남에는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김동관 한화큐셀 전무 등 재계 3세와 이해진 네이버 글로벌최고투자책임자,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등 한국을 대표하는 IT기업 최고경영자들이 참석했다. 재계의 세대교체를 알리는 동시에 인공지능과 같은 차세대 먹거리를 책임질 기업인들의 면면을 확인시켜준 자리로 볼 수 있다.
앞서 삼성전자는 지난 4월 '반도체 비전 2030'을 통해 오는 2030년까지 총 133조원을 투자해 비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겠다는 청사진을 발표했다. 반도체 사업을 결정한 이병철 선대 회장과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를 세계 1위로 키운 이건희 회장의 뒤를 이어 한국을 명실상부한 반도체 1위 국가로 올려놓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삼성전자 사업장을 찾아 "원대한 목표 설정에 박수를 보내며 정부도 적극적으로 돕겠다"며 삼성을 격려했다.
언제 터질지 모를 미중간 무역분쟁
검찰수사로 위기돌파 컨트롤타워 마비
하지만 이 부회장이 선대 못지 않은 기업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넘어야할 산이 적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우선 대외여건이 좋지 않다. 이 부회장이 엿새째 일본에 머물며 해법 찾기에 골몰하는 것도 삼성전자가 느끼는 위기감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걸 시사한다.
재계 관계자는 "비메모리 분야에서 야심찬 도전을 시작하는 순간 터져나온 일본의 수출규제로 삼성은 반도체 공급사슬의 입구가 틀어막힐 위기에 처했다"고 말했다.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회의를 통해 '휴전'을 하긴 했지만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이 언제 다시 불붙을지 모르는 점도 부담이다. 반도체를 중국에 수출하고 완제품을 미국에 수출하는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미중간 분쟁이 격화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삼성 내부에서는 컨트롤타워의 붕괴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혐의를 수사 중인 검찰은 김태한 사장 등 삼성바이오 경영진을 잇따라 소환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삼성전자와 삼성바이오 임직원 8명이 구속됐다.
특히 삼성전자 등 전자계열사의 협업과 미래사업을 챙기는 사업지원 태스크포스 소속 임원들이 구속되면서 컨트롤타워 업무가 사실상 마비된 게 뼈아프게 작용하고 있다. 삼성은 총수와 전문경영인으로 구성된 참모조직이 '이인삼각(二人三脚)'으로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위기를 돌파해왔는데 더는 이같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이 자신들이 처한 위기를 돌파하고 새로운 기회를 만들 수 있도록 '일할 수 있는 여건'은 만들어줘야 한다"며 "시시비비는 명확히 가리되 큰 일을 그르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른 관계자는 "내우외환 국면에서 이 부회장이 어떤 돌파력을 보이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