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산업계에서 가장 '핫'한 이슈는 '애플카'입니다. 수년 전부터 '떡밥'만 뿌려오던 애플이 본격적으로 차를 만들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바다를 건너오기 시작했습니다. LG전자가 애플카 생산 논의에 참여한 적 있는 캐나다의 자동차 부품회사 마그나와 합작사를 차린다는 소식에 주식시장에서 상한가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대기업도 상한가를 가네"하며 놀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애플과 손을 잡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RE100입니다. RE100은 오는 2050년까지 사용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사용하겠다고 약속하는 캠페인입니다. 국제단체인 CDP(Carbon Disclosure Project) 위원회와 기후그룹(The Climate Group)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연간 100Gwh 이상의 전력을 소비하는 기업들이 참여 대상이며 이미 280여 개 글로벌 기업이 해당 캠페인에 가입했습니다. 애플도 대표적인 RE100 가입사입니다.
# 내가 안 태우면 너도 못 태운다
문제(?)는 RE100에 참여한 회사들은 납품 업체에도 "100%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부품만 납품하라"는 요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지난 2018년 BMW가 삼성SDI에 재생에너지 사용을 요구하자 국내에서 생산하던 부품을 재생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는 해외공장에서 생산하기로 결정한 일도 있습니다. 당시 같은 요구를 받은 LG전자는 대안이 없어 거래가 무산됐다고 합니다.
애플도 대표적인 RE100 가입 회사입니다. 애플은 공급업체들이 애플에 납품하는 부품을 만들 때 재생에너지로 제조하겠다는 서약을 받고 있습니다. 바로 협력업체 청정에너지 프로그램(SCEP·Supplier Clean Energy Program)입니다. 이미 17개국 72개 협력업체를 이 프로그램에 가입시켰습니다. 참여하지 않은 회사는 향후 애플의 납품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상황은 글로벌 대기업에 납품하는 국내 제조업체로서는 비상사태입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신재생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전력거래소와 한국에너지공단에 따르면 2019년 기준 국내 전체 발전설비용량 중 신재생에너지 발전설비 비중은 전체의 13% 수준입니다. 하지만 실제 가동률이 반영된 신재생에너지 발전량은 전체의 5.6% 수준입니다.
발전량을 늘리는 일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이미 글로벌 회사들은 신재생에너지 활용을 강요하는 상황입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서 우리 기업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 K-RE100…"RE100로 가는 발판이 되리"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형 RE100(K-RE100)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됩니다. K-RE100에 참여한다고 해서 RE100에 참여할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K-RE100 제도를 통해 신재생에너지 발전량을 확보해 궁극적으로는 탄소중립을 실천하자는 게 제도의 목적입니다. 그 과정에서 국내 기업들의 RE100 가입을 지원하고 유도할 수 있습니다.
이 제도에 참여하는 '이행수단'은 총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녹색 프리미엄, REC 구매, 제3자 PPA, 지분참여, 자가용 설비 설치입니다. K-RE100은 대기업 위주의 RE100과는 달리 국내에서 전기를 소비하는 사용자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신재생에너지 사용을 유도하면서 신재생에너지 발전을 위한 투자까지 끌어내기 위해서입니다.
# REC 구매…"골라 골라, 골라 잡아"
이 제도를 이해하려면 사전 지식이 필요합니다. 바로 REC와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입니다.
지난 2012년부터 발전 설비 용량이 500MW 이상인 발전 사업자는 의무적으로 총발전량의 일정 비율을 신재생에너지로 공급해야 합니다. 바로 RPS(Renewable Energy Portfolio Standard)라는 제도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관련 설비를 갖추지 못한 발전소가 많습니다. 이럴 경우 다른 신재생에너지 발전 사업자가 발급한 REC(신재생에너지 공급인증서·Renewable Energy Certificates)를 구입해 의무할당량을 채우면 됩니다.
그동안은 RPS 공급의무자만 구매가 가능했던 REC를 이제는 일반 기업 등 전기소비자도 구매할 수 있게 됐습니다. REC를 구입한 만큼은 신재생에너지를 사용했다고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정부는 이를 위해 기업이 REC를 구입하면 온실가스를 감축한 것으로 인정해주기로 했습니다.
현재 환경부는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 제3차 계획기간(2021~2025년)의 할당대상 업체로 지정된 684개 업체에 온실가스 배출권 26억800만톤을 할당했습니다. 기존에는 배출권이 모자랄 경우 남는 회사로부터 사 오거나 과태료를 물어야 했지만, 이제는 신재생에너지 발전 사업자로부터 REC를 구매하는 방법이 추가된 것입니다.
특히 이 제도는 민간 태양광 발전업계가 가장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민간 태양광발전 사업자의 가장 큰 수익은 발전소에 REC를 파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수년간 REC 가격이 꾸준히 내려가고 있어 수익성이 악화되던 상황입니다. 이제 REC를 팔 수 있는 곳이 일반 기업으로 확대되면서 REC 가격 안정화와 이를 통한 투자여력 확보 등이 기대되고 있습니다.
# 제3자 PPA…"전 다른 거 말고 신재생전기만 줘요"
PPA(Power Purchase Agreement)는 기업 활동에 필요한 전력을 공급받기 위해 기업이 발전사업자와 직접 체결하는 계약을 말합니다. 신재생에너지를 공급받고 싶으면 신재생에너지 발전 사업자와 계약해 전기를 받으면 됩니다. PPA는 최소 5년 이상의 장기계약으로 체결해야 합니다. 안정적인 투자를 위한 장치입니다.
이 제도를 쉽게 이해하자면 이동통신사를 떠올리면 됩니다. 우리가 핸드폰을 쓰려면 SKT, KT, LGU 등 이동통신사를 골라 계약을 맺어야 합니다. SKT 신호가 강한 지역이라고 해서 KT로 계약한 핸드폰이 SKT 신호를 잡아주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약정 기간동안은 해당 이동통신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기를 마치 전파처럼 발전소와 별도 계약해 쓴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도입이 어려웠던 제도입니다. 전력공급 계약을 발전소가 아니라 한국전력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한전이 공급하는 전기에는 꼬리표가 없습니다. 어느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인지 구별하지 않았죠.
하지만 신재생에너지 발전을 위해서 이제 전기에도 꼬리표를 달 예정입니다. 한전은 PPA 계약의 중개업자로 참여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제3자 PPA입니다. 한전의 중개로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로부터 전기를 공급받으면 '재생에너지 사용 확인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확인서도 REC와 마찬가지로 온실가스 감축 실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 지분참여…"길게 봐야 오래가요"
지분참여는 기업이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에 직접 투자를 하는 방법입니다. 신재생에너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는 기업에 적합한 제도입니다. 투자를 받은 발전사업자나 재생에너지 프로젝트는 해당 기업과 제3자 PPA를 체결하거나 REC계약을 하는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확보한 REC나 재생에너지 사용 확인서는 온실가스 감축 실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 자가용 설비…"내건 내가 만들어요"
사실 가장 심플한 방법입니다. 전기소비자가 직접 자가용 재생에너지 설비를 설치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실 새로운 방법은 아닙니다. 이미 많은 기업들이 태양광 발전설비를 갖추고 직접 전기를 생산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전기요금을 절약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죠.
하지만 이제 자체적으로 발전해 사용한 전기에 대해서도 정부는 재생에너지 사용 확인서를 발급해줄 예정입니다. 다른 방법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발급된 확인서는 온실가스 감축 실적으로 사용하면 됩니다.
# 녹색 프리미엄…"돈으로 사겠어. 얼마면 돼?"
녹색 프리미엄은 K-RE100에 참여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입니다. 돈만 있으면 됩니다. 기존전기 소비자가 전기요금과 별도로 '녹색 프리미엄'을 한전에 납부하는 제도입니다.
쉽게 말해 전기를 실제 쓴 것보다 요금을 더 내는 것입니다. 한전은 녹색 프리미엄을 받고 '재생에너지 사용 확인서'를 발급해줍니다. 녹색 프리미엄은 재생에너지 관련 투자에 사용됩니다.
얼핏 들으면 이상한 제도입니다. 쓴 것보다 굳이 요금을 더 내다니요. 일반 소비자라면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지만 이미 해외에서는 활용하는 제도입니다.
일본의 경우 그린전력기금이라는 이름으로 기부금을 받아 신재생에너지 관련 펀딩에 사용하고 있으며, 호주도 Green Power라는 추가요금제를 통해 인증서를 발부하고 있습니다.
사실 녹색 프리미엄은 한전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K-RE100 이행수단입니다. 다른 수단은 한국에너지공단이 주도하지만 이 제도는 한전이 주무부처입니다
그런데도 설명을 가장 뒤에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녹색 프리미엄을 통해 받은 확인서는 위의 제도들과 달리 온실가스 감축 실적에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걸 왜 하죠?
녹색 프리미엄을 온실가스 감축 실적에 포함할지 여부는 제도를 디자인한 산업부의 깊은 고민이 담긴 주제였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제외됐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제도는 실제로 신재생에너지를 활용해 발전된 전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녹색 프리미엄은 신재생에너지로의 투자를 약속하긴 했지만 당장은 재생에너지가 생산된 것도 사용된 것도 아닙니다.
만약 녹색 프리미엄을 배출권으로 인정해준다면 실제로 온실가스 감축량은 줄어들어 버립니다. 배출권 문제를 돈으로 해결해버리는 꼼수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안될 말입니다.
그렇다고 녹색 프리미엄은 '프리미엄'이 없는 제도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장 금전적인 혜택을 주지는 않지만 기업의 마케팅 활동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더 비싸더라도 가치있는 것에 소비하는 것이 MZ세대의 소비 트렌드라는 점에서 효과가 기대되는 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