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9월의 일입니다. 미 연방정부 기관인 증권거래위원회(SEC)가 한국전력에 '2018년 적자 원인을 보고하라'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한전은 지난 1994년 뉴욕증시에 상장한 SEC 감독 대상 기업입니다. 한전이 2018년 2080억원 규모의 영업적자를 낸 이유를 설명하라는 요구였습니다. 이에 한전은 '연료가격 상승분만큼 전기요금이 인상되지 않아 적자가 발생했다'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연료 가격이 내려간다면 한전이 흑자를 기록할까요? 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 한전 지난해 영업이익 4.1조…3년 만의 흑자
한국전력은 지난해 연결기준 영업이익이 4조863억원이라고 19일 공시했습니다. 3년 만의 흑자전환입니다. 덕분에 당기순이익도 2019년 2조2635억원 규모 적자에서 2조939억원 흑자로 돌아섰습니다. 주주들이라면 배당을 기대할 수도 있겠네요. SEC도 이제 안심할 것 같습니다.
지난해 한전의 경영환경에 어떤 변화가 생긴 걸까요. 전기요금을 올린 것도 아니고 국내 전기소비량이 늘어난 것도 아닙니다. 한전이 이미 답을 내놓았습니다. 흑자 비결은 국제유가의 하락 덕분입니다. 전기를 만드는 비용이 낮아진 겁니다.
# 국제 연료가격 인하 덕분에 매출원가 크게 줄어
2019년과 비교해 2020년 한전의 매출은 오히려 줄었습니다. 59조1729억원에서 58조5693억원으로 내려갔습니다. 코로나19가 길어져 상업시설의 전기사용이 줄고, 마침 장마 기간도 길어서 냉방용 전기 수요도 감소했습니다.
다행히 매출원가가 크게 줄었습니다. 한전은 "영업비용이 줄었다"고 표현했습니다. 매출이 줄더라도 매출원가가 같이 줄어들거나 더 큰 폭으로 줄어들면 수익성은 좋아집니다.
2019년 18조2609억원이 들었던 연료비가 지난해에는 14조7940억원으로 19% 감소했습니다. 민간발전소로부터 전기를 사올 때 들어가는 전력구입비도 18조2697억원에서 15조7252억원으로 14% 줄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매출원가 부분에서 총 5조9664억원 규모의 비용절감이 이뤄졌다고 합니다.
한전이 지출하는 연료비가 뭘까요. 바로 발전소를 가동하기 위해 들어가는 원유와 유연탄 등의 가격을 말합니다. 지난해 국제 유가와 유연탄 가격의 하락이 떨어진 것이 한전입장에서 큰 호재였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 수출입동향과 한국광물자원공사의 자원정보서비스에 따르면 지난해 1분기부터 원유와 유연탄의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원유가격이 급락합니다. 한전의 발전자회사들이 전기를 더 싸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연료비 하락은 다른 민자 발전사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 결과 한전이 민자 발전소로부터 사는 전기의 가격, 즉 전력시장가격(SMP)도 급락했습니다. 한전에 따르면 국제 연료 가격은 약 5~6개월의 시차를 두고 SMP에 반영됩니다. 그 결과 지난해 SMP 가격은 kWh(킬로와트시)당 평균 68.9원으로 2019년과 비교해 21.8원 내렸습니다.
# 연료비 변동…전기요금 제도 변경으로 '십시일반'
그러면 이제 한전에 봄날이 온 걸까요. 그래프를 보시면 지난해 말부터 다시 연료비가 상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연료비가 오르면 다시 매출원가가 늘어나고 그러면 이익 폭이 줄 거나 다시 적자를 기록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올해부터 전기요금 체계가 바뀌었습니다. 한전 관계자는 "한전의 영업실적은 연료 가격 변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며 "하지만 2021년부터 원가연계형 요금제 시행으로 연료비 변동분은 주기적으로 전기요금에 반영된다"고 말했습니다.
원가연계형 요금제란 원가가 오르면 요금도 오르고, 반대로 원가가 떨어지면 요금도 내리겠다는 얘기입니다. 한전은 1년에 네 차례에 걸쳐 연료비 조정을 요금에 반영할 예정입니다. 지난해 연말부터 다시 오른 국제 연료 가격은 빠르면 올해 2분기부터 적용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전기요금이 오르겠네요.
한전 입장에서는 연료비의 등락을 요금에 반영할 수 있어서 합리적이지만 당장 고지서를 받아들 소비자들은 반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연료비를 요금에 산정하는 것은 시장경제 체제에서 '합리적'입니다. 재화의 가격은 재화를 만든 가격에 마진을 더해서 정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기존 전기요금 체계는 전기의 가격을 미리 정해둔 뒤 싸게 만들면 남기고 비싸게 만들면 손해를 보는 구조였습니다. 심지어 한전이 손을 댈 수 없는 국제 연료 가격에 좌우됐습니다. 불확실성이 너무 컸습니다. 지난해처럼 큰 이익을 볼 때도 있고 2019년처럼 적자를 기록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국제유가나 유연탄 가격이 등락하더라도 한전 입장에서 이익규모가 크게 움직일 일이 적어집니다. 영업이익 대박을 내기는 힘들어져도 쪽박을 찰 일도 적어집니다. 이런 경우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이익 변동성이 축소(완화)됐다"는 표현을 씁니다. 문경원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한전에 대해 "요금이 원가를 충실히 반영한다면, 매년 2조4000억~3조원의 별도 영업이익이 기대된다"고 분석했습니다.
유가나 유연탄 가격 상승으로 전기요금 인상이 걱정되는 소비자를 위한 안전장치도 있습니다. 연료비 조정요금은 kWh당 최대 ±5원의 범위 내에서만 변동이 가능합니다. 이는 평균 350kWh의 전력을 쓰는 4인 가구 기준 매달 최대 1750원 수준입니다. 이제는 연료비 변화를 전기를 쓰는 모든 소비자가 나눠서 부담하는 것입니다. 전기요금에 관심을 더 둘 이유가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