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석유화학 산업이 '탈범용'이라는 구조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기술·설비·수요 세 축이 동시에 흔들리는 가운데 국내 기업들은 생존을 위한 전략적 분기점에 직면했다. 정체됐던 구조조정도 일부 기업 간 자발적 통합 움직임을 계기로 물꼬를 트고 있다. 하지만 민간 주도의 합종연횡만으로는 속도도 방향도 제한적이다. 정권 교체는 해묵은 개편 논의에 실질적 해법을 제시할 분기점이다. 이재명 정부가 공약한 '석유화학특별법'은 단순 지원을 넘어 산업 지형의 재설계를 겨냥하고 있다. 변곡점의 지형 한복판에서 움직이는 기업·바뀌는 시장·달라질 정책을 연속기획으로 짚어본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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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량은 넘치고 수익성은 바닥이다. 국내 석유화학 산업은 구조적 공급 과잉과 중국·중동발 저가 공세에 밀려 설비 가동률이 70%대까지 추락했다. 뾰족한 해법은 보이지 않는다. 설비를 줄이자니 손실이 막대하고, 통합하자니 법이 가로막는다. 수천억원이 투입된 NCC(나프타분해설비)는 폐쇄도 매각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인수합병은 공정거래법에 걸려 지지부진하고 자율 구조조정은 작동하지 않는다. 스스로 몸집을 줄일 수 없는 산업. 정부와 기업은 이제 구조조정의 룰 자체를 바꿔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법 앞에서 멈춘 통합…'시장 지배력'이란 역설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의 생산설비 가동률이 70% 안팎까지 떨어졌다. 과잉설비와 수익성 악화가 이어지고 있지만 자발적으로 설비를 줄이는 기업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셧다운에 따른 손실이 막대한 데다 협력사와 고정비 부담까지 고려하면, 기업들이 쉽게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구조다.
특히 NCC의 경우 수천억원이 투입된 대형 생산시설인 만큼 단순 폐쇄보다 합작 또는 설비 통합 방식이 보다 현실적인 해법으로 거론된다. 하지만 인수합병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일부 기업이 설비를 시장에 내놓았지만 매수자는 드물고 가격 눈높이도 맞지 않아 거래는 좀처럼 성사되지 않고 있다.

구조조정이 지연되는 가장 큰 이유는 '법'과 '제도'라는 족쇄 때문이다. 특히 공정거래법 제9조는 기업 간 인수합병이나 설비 통합이 '시장 경쟁을 제한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이를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공급자 중심 해법인 '설비 통합'이 공정위 심사에서 소비자 이익이나 경쟁 저해 논리에 막히는 구조다. 공급량을 줄여 업계 전반의 손익을 개선하겠다는 논리가 시장 지배력 우려로 뒤집히는 셈이다.
이 법에 따르면, 한 기업의 결합으로 시장점유율이 50%를 넘거나 결합한 상위 3개 기업의 점유율 합이 75%를 초과할 경우 경쟁 제한성이 있다고 '추정'된다. 이는 별도의 복잡한 심사 없이도 공정위가 시장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사실상 자동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가령 에틸렌 기준 롯데케미칼의 시장점유율은 약 18%, LG화학은 약 26%다. 이 둘만 합쳐도 44%에 이르는데, 여천NCC 등 계열 합작사의 물량까지 더하면 단숨에 50%를 넘어선다. 이 경우 공정위의 기업결합 심사대상에 포함, 시장지배적 지위 형성을 이유로 인수합병이나 설비 통합이 불허되거나 조건부 승인을 받아야 할 수 있다. 공정위가 과점 형성 가능성을 근거로 결합 자체를 제한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과정이 단순 행정 절차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도 부담이다. 공정위가 '경쟁을 심각하게 제한한다'고 판단할 경우, 기업결합 자체를 불허하거나 특정 사업 부문을 매각하라는 등의 시정조치를 명령할 수 있다. 구조조정을 시도하다 오히려 더 큰 손실을 떠안을 위험이 있는 셈이다.
공정거래법에도 예외 조항은 있다. 제9조 제2항은 기업결합이 경쟁을 제한하더라도 △그 외의 방법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효율성 증대 효과가 있거나 △회생 불가능한 기업과의 결합일 경우에는 예외로 인정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업계에선 "이러한 예외 요건은 사실상 충족 불가능하다"는 냉소가 지배적이다. 공정위가 요구하는 '효율성'은 단순한 원가 절감을 넘어, 경쟁 제한이라는 리스크를 감수하고도 남을 만큼의 경제적 이익을 수치와 근거로 정밀하게 입증해야만 인정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통합만으로 그 정도의 경제적 효과를 객관적으로 증명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업황 전반이 흔들리는 지금, 통합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회생 불능 기업' 요건도 현실 적용이 까다롭다. 단순히 부채가 많고 적자가 누적됐다고 해서 회생 불가능 판정을 받는 건 어렵다. 법적 회생절차를 거쳐도 생존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점을 명확히 입증해야 하는데, 현재 대부분의 기업은 '정리 대상'이라기보다 '구조조정 대상'에 가깝다는 평가다.
"중국 의존은 위험"…요소 사태서 배워야 할 교훈

이 같은 한계를 돌파할 유일한 해법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특별법'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당시 여수 지역 공약으로 '석유화학산업 구조재편 특별법'을 제안했으며, 이달 들어 주철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주도로 실제 입법이 추진되고 있다.
법안에는 산업 인프라 전환을 위한 △전기요금 감면 △세제 혜택 △인허가 간소화 △구조 전환 기업에 대한 보조금 등 정부가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수단들이 담겼다.
이에 대해 전유진 iM증권 연구원은 "이번 정부는 과거처럼 구조조정을 민간 자율에 맡기기보다 '큰 정부' 기조 아래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크다"며 "강제적 방식은 아니겠지만, 1980년대 일본처럼 △효율적 설비 이전 △공동 투자·판매사 설립 등 고부가 중심의 R&D 지원과 세제 혜택을 결합한 투트랙 재편이 시도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구조조정에 개입하더라도 단순 '행정 조율'에 그쳐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실질적인 제도 개혁과 전략적 판단이 함께 이뤄져야 구조조정이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정부가 민간 주도의 구조조정을 단순히 '교통정리' 수준으로 바라봐선 안 된다"며 "공정거래법뿐 아니라 화평법·화관법* 등 현행 제도가 기업 간 통합을 사실상 가로막고 있는 만큼 규제의 현실화 없이는 구조조정도 공허한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화평법: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 화관법: 화학물질관리법
위 두 법은 유해 화학물질로 인한 건강·환경 피해를 예방하려는 취지에서 제정됐으나, 업계에선 설비 통합·변경 과정에서의 과도한 인허가 절차가 구조조정의 속도를 늦추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시장지배력 우려로 통합이 지연되는 현실과 관련해선 "정부가 기업에 통합을 지시하라는 게 아니라 지금의 법적 장애물을 낮춰줘야 한다는 얘기"라고 짚었다. 이어 "이제 와서 특정 기업들을 상대로 '합치라'고 명령하는 관제식 구조조정을 하자는 게 아니다"라며 "그건 시대착오적 발상이고, 지금 같은 복합위기 국면에선 최소한 민간이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도록 제도적 족쇄부터 걷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석유화학 구조조정이 단순한 비용 절감 논리에 매몰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NCC는 범용 소재 관련 설비이지만, 제조업 기반을 떠받치는 핵심 인프라"라며 "중장기적 관점에서 '산업 안보 자산'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값싼 중국산 공급을 이유로 국내 생산을 포기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단호히 선을 그었다. 그는 "2000년대 초반 값싼 중국산 요소가 쏟아지자 '이제 굳이 국내에서 생산할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가 확산, 결국 2011년께 국내 요소 생산 공장이 모두 철거됐다"며 "그 결과 요소수 대란과 비료 수급 불안이라는 치명적인 사태를 겪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NCC는 값싼 범용 제품을 만들어내는 생산설비지만 국가 제조업 전체를 떠받치는 기초 인프라"라며 "지금은 중국과 중동에서 값싼 에틸렌이 넘쳐나 국내 생산의 필요성이 낮아 보일 수 있으나 막상 NCC 설비를 철거해버리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후 중국이 가격을 조정하거나 공급을 제한하면 우리는 제값을 요구받고 대응할 수단조차 없는 '경제 속국'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교수는 일본과 미국이 여전히 자국 내 요소 생산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두 나라 모두 값싼 중국산 요소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고순도 요소'만큼은 자국에서 생산해 산업 안보를 지키고 있다"며 "석유화학 구조조정은 단기 수익성이 아닌 국가 전략자산 확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