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에너지솔루션(옛 LG화학 배터리 사업 부문, LG엔솔)이 SK이노베이션(SKI)과의 2년에 걸친 '배터리 분쟁'에서 승리했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US International Trade Commission, ITC)가 LG엔솔이 SKI를 상대로 제기한 2차전지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SKI의 전기차 관련 배터리 부품·소재에 대한 10년간의 미국 내 수입금지 요청을 인용하면서다.
아직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같은 변수는 남았다. 하지만 시장의 현실적인 관심은 양사가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지에 쏠리고 있다. 양쪽이 원하는 합의금 액수의 차이가 조 단위로 갈리기에 SK와 LG 그룹 총수 간 '빅딜'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 "SKI 차 배터리, 10년간 미국서 못판다"
ITC는 우리나라 설 연휴 중이었던 지난 10일(현지시간) 내린 최종결정에서 LG에너지솔루션의 영업비밀을 침해한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셀·모듈·팩 및 관련 부품·소재가 미국 관세법 337조를 위반했다며 미국 내 수입 금지 10년을 명령했다. 이미 수입된 침해 품목에 대해서도 미국 내 생산과 유통 및 판매를 금지하는 '영업비밀 침해 중지 10년 명령'을 내렸다.
LG엔솔은 이번 ITC 결정에 대해 "SKI가 그동안 LG엔솔의 2차전지 관련 영업비밀을 탈취해 연구개발, 생산, 테스트, 수주, 마케팅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부정하게 사용하면서 경제적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LG엔솔의 주장을 인정한 것"이라며 "지난 30여 년 간 수십 조원의 투자로 쌓아온 지식재산권을 법적으로 정당하게 보호받게 됐다"고 강조했다.
SKI는 여전히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회사 측은 "영업비밀 침해에 대한 실질적인 판단이 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아쉽게 생각한다"며 "아직 남아 있는 절차를 통해 해당 결정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ITC는 제한적으로 SKI의 포드 전기픽업트럭 'F150' 공급용 배터리 부품·소재는 4년간, 폭스바겐 MEB용은 2년간 수입을 허용했다. 이미 판매 중인 기아 전기차용 배터리 수리 및 교체를 위한 전지 제품의 수입도 허락했다. 하지만 LG엔솔은 이렇게 제한적으로 수입이 허용된 침해 품목 역시 추후 델라웨어 연방지방법원 소송을 통해 SKI로부터 손해배상을 받겠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앞서 LG화학이 ITC에 소송을 제기한 건 2019년 4월29일이다. 그해 9월 당시 양사 최고경영자(CEO)인 신학철 LG화학 부회장과 김준 SKI 총괄 사장이 전격 회동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인 지난해 2월 ITC 행정판사는 SKI의 조기패소(Default Judgment)를 결정했고 승기는 LG 쪽으로 기울었다. 최종 판결은 예상보다 늦어졌지만 결국 법정에서의 승리는 LG였다.
◇ LG "소모전 그만"…SK "아직 모른다"
LG에너지솔루션은 당연히 기세가 등등하다. SKI에 결과를 인정하고 납득할 만한 합의안을 제시하라며 압박을 가하고 있다. ITC의 최종결정 이후 60일 동안 대통령 심의 기간이 있으나, ITC 설립 100여년 동안 영업비밀 침해 행위에 대한 대통령 거부권이 행사된 사례는 거의 없다. 2010년 이후 ITC 최종 결정에서 수입금지 명령이 나온 영업비밀 침해 소송은 총 6건. 이 중 5건이 항소를 진행했으나 결과가 바뀐 사례는 없었다.
LG엔솔은 "SKI가 이제라도 상황을 왜곡하는 행위를 멈추고, ITC 최종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부합하는 제안을 함으로써 하루빨리 소송을 마무리하는데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LG엔솔은 주주와 투자자가 납득할 수 있는 합의안이 제시되지 않는 경우, ITC 최종 승소 결과를 토대로 추가 행동에 나서겠다는 방침이다. 소모전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태세다.
일단 델라웨어 연방지방법원에 제기한 영업비밀 침해 품목에 대한 미국 내 사용 금지와 손해배상 청구 소송 등 국내외에서 진행 중인 다른 소송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임해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게 LG 쪽 입장이다. LG엔솔 관계자는 "이제는 영업비밀 침해 최종 결정을 인정하고 소송전을 마무리하기 위한 진정성 있는 태도를 보여주길 기대한다"고 했다.
그러나 SK이노베이션은 ITC 판결 내용을 면밀히 분석하는 한편, 항소와 미국 대통령 거부권 행사 등의 반격 기회를 찾고 있다. SKI 관계자는 "이후의 절차(Presidential Review)를 통해 이번 결정을 바로 잡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한편 ITC의 판결 내용을 면밀히 분석해 향후 항소 등 정해진 절차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해 진실을 가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특히 SKI는 이번 ITC 결정이 미국의 관련 산업 생태계 발전과 전기차 소비자 안전에 큰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전달할 계획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SK의 배터리는 지난 10년 이상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에 공급돼 안정성 문제가 일어난 적 없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배터리'"라며 "이를 미국 전기차 제조 기업을 통해 미국 소비자에게 공급할 수 없게 되면, 미국 기업과 소비자 입장에서는 큰 손실이라는 점을 강조할 방침"이라고 했다.
아울러 SKI가 미국 조지아에 건설하고 있는 배터리 공장은 최고 50억 달러가 투자돼 최대 6000여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할 규모인 점도 강조한다는 구상이다. 조지아 주지사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 거부권을 요청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으로 알려졌다. SKI는 "만약 이 공장이 중도에 가동을 중단하게 된다면 그 피해는 SK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조지아 전체, 나아가 미국경제와 사회에까지도 미칠 수밖에 없음을 적극 전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조단위 격차' 합의 가능할까
SKI는 이런 배경에서 '합리적인 조건'이어야 합의를 위한 협상에 임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관건은 합의금 액수다. 시장에서 거론되는 합의금 액수는 LG엔솔의 경우 최대 5조원, SKI는 수천억원 단위다. 각각의 전략이 반영된 숫자지만 금액 차이가 커도 너무 크다. 양 쪽 관계자 모두 "합의금 규모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장승세 LG엔솔 경영전략총괄(전무)는 설 연휴 기간인 지난 11일 ITC 판결 직후 컨퍼런스콜(전화회의)에서 "SK와의 배상액 협상은 작년부터 최근까지 여러차례 진행됐다"며 "최종 결정이 났으니 조만간 다시 더 협상 논의가 시작돼 진전되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합의금 규모 외에도 지급 방식도 관심이다. 로열티 지불이나 분납 혹은 전혀 다른 유형의 방식도 검토 가능하다. 이 회사 법무실장인 한웅재 전무는 "SK가 진정성 있는 자세로 임한다면 (다른 방식을) 검토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장 전무는 다만 "구체적인 방식이나 형태, 현금성일지 로열티가 될지 분납을 할지 일시로 할지, 각론을 정하기 위해선 총액이 어느정도 눈높이가 근접해야 추가 논의가 가능하다"고 했다.
이런 까닭에 최태원 SK 회장과 구광모 LG 회장이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일각에서 나온다. 과거에 진행된 CEO 레벨의 논의로는 해결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수가 계열사의 막대한 손익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사안에 개입하는 것이 자칫 배임 등의 혐의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스럽다. 양사 관계자들도 총수 간 회동 가능성에 대해선 말을 아끼며 "시기상조"라고 입을 모았다.
양사의 분쟁이 서로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마무리되길 기대하는 여론도 있다. 전기차 배터리 시장은 미국과 중국, 유럽연합 등 주요국을 중심으로 친환경 정책이 강하게 추진되며 그 규모가 빠르게 커지고 장기적으로 유망한 분야여서다. 최근 정세균 국무총리가 양사의 합의를 종용한 것도 전기차 배터리 산업이 국익 차원에서 육성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미국 에너지부에 따르면 2011년 1만7763대에 불과했던 전기차 판매량은 2019년 32만6644대를 기록했다. 전기차 원가의 40%를 차지하는 배터리는 해당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LG엔솔 측은 "이번 최종 결론 이후 60일 동안 피고인 SKI가 공탁금을 내면 수입금지 명령의 효력은 일시중단되고, 이 기간에 합의가 이뤄지면 공장 가동에는 영향이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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