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기한 유예' 상태였던 중국 반도체 장비 반입이 다시 멈춰설 위기에 놓였습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적용 중이던 'VEU(검증된 최종 사용자)' 면제를 철회하겠다는 방침을 비공식적으로 전달했기 때문인데요. 당장 규제 시행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반도체 공급망을 둘러싼 미·중 간 기술 패권 다툼이 다시 국내 기업들을 정조준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기술 업그레이드부터 장비 수급, 생산 전략 전반까지 리셋이 불가피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트럼프發 반도체 규제 다시 고개
최근 제프리 케슬러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 담당 차관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만 TSMC에 비공식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중국 내 반도체 공장에 적용 중인 VEU 면제를 철회하고, 향후 미국산 장비 반입을 건별 허가제로 전환할 수 있다는 내용이 골자로 알려지는데요. 이는 지금까지 별도 승인 없이 반입할 수 있었던 장비들도 향후 건건이 미국 정부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이 절차가 단순 행정 요건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허가를 신청할 때마다 수주에서 수개월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고, 미국 정부의 외교·안보적 판단에 따라 반입이 지연되거나 거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장비 한 대의 반입이 늦어지면 생산 일정 전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고 정기적인 설비 교체나 공정 업그레이드도 제때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특히 기술 변화 속도가 빠른 메모리 반도체 산업에선 이 '타이밍 하나'가 제품 경쟁력은 물론 시장 점유율까지 좌우할 수 있습니다. 국내 업계가 이번 VEU 면제 철회 움직임에 유독 민감히 반응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입니다.

불과 1년 8개월 전인 2023년 10월만 해도 분위기는 정반대였습니다. 미국 정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VEU'로 공식 지정하며 "무기한 유예"라는 표현까지 사용했습니다. 장비 반입에 별도 승인 절차는 필요하지 않다고 못 박았죠. 당시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이 "반도체 통상 현안이 일단락됐다"고 밝힐 정도로 업계는 이를 사실상 최상의 시나리오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같은 면제 조치는 앞서 2022년 발표된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통제에서 비롯됐습니다. △16nm 이하 시스템 반도체 △18nm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 생산에 필요한 미국산 장비의 중국 수출이 원칙적으로 금지된 가운데 한국 메모리 기업만큼은 예외로 인정한 것이었죠.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58%를 차지하는 한국 기업들의 중국 생산기지를 한꺼번에 막는 건 미국 입장서도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맹국의 산업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외교적 고려와 글로벌 공급망 혼란을 피하려는 경제적 판단이 복합 작용한 결과로 풀이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판이 달라졌습니다. 당시엔 동맹과 시장 안정을 함께 고려했지만 이제 미국의 셈법은 명확합니다. '반도체 규제'는 중국과의 힘겨루기, 전략적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카드로 다시 꺼내 든 수단입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미·중 간에는 외교 채널 복원과 고위급 협의 재개를 중심으로 '완화 제스처'가 오가며 긴장이 다소 누그러진 듯한 분위기가 연출됐습니다. 기후 협력·군사 소통 재개·일부 공급망 이슈에선 형식적 공감대가 만들어졌다는 평가도 나왔죠.
그러나 반도체를 비롯한 핵심 기술과 전략물자 통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본질적인 이견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미국은 동맹국 기업까지 포함해 수출통제 강화에 나서고 있고, 중국은 희토류와 전략 광물 수출 제한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큰 틀의 협력'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 협상 테이블에선 갈등의 불씨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반도체전문연구원은 "표면적으로는 미·중 간 큰 틀의 합의가 이뤄졌다고 하나, 실제 세부 조율이 지연되거나 좌초되고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며 "반도체는 현재 미국이 중국을 가장 효과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확실한 카드"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아직 공식적인 관세 조치가 시행된 건 아니지만 이번 방침은 관세 부과나 본격 협상의 전조로 작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같은 통보, 다른 파장…韓 기업 정조준된 이유
TSMC도 같은 통보를 받았지만 셈법은 확연히 다릅니다. TSMC는 중국 상하이와 난징에 구형 공정 중심의 파운드리 라인을 두고 있을 뿐, 첨단 공정은 애리조나·대만·중동 등으로 이미 분산시켜놓은 상태입니다. 미국산 최첨단 장비에 대한 의존도 역시 낮은 편이라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 시안·쑤저우·우시·충칭·다롄 등에 핵심 생산 거점을 다수 운영하고 있습니다. 두 회사의 글로벌 메모리 생산량 가운데 약 40%가 이들 중국 공장에서 나옵니다.
특히 시안과 우시는 각각 낸드플래시와 D램 생산의 심장부로 꼽히는데요. 올해 1분기 기준 삼성전자 시안 법인은 2조2443억원, SK하이닉스 우시 법인은 2조2082억원의 매출을 각각 올렸습니다. 생산 거점이 실적과 맞물려 있는 만큼 VEU 철회가 현실화될 경우 삼성과 SK하이닉스가 받는 충격은 TSMC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습니다.

VEU가 폐지되고 허가제로 전환될 경우, 신규 장비 반입은 물론 기존 장비의 업그레이드나 수리 절차도 지연됩니다. 김양팽 연구원은 "첨단 장비 도입을 제때 하지 못하면 기술 경쟁력 유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만약 규제 범위가 현재 생산 중인 제품으로까지 확대되면 일상적인 양산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다만 그는 "기업들이 'VEU 유예'를 사실상 한시적 조치로 인식해 왔다는 점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대비는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습니다. 설령 허가제로 전환된다 해도 이를 감안한 설비 투자 조정이나 생산 전략 수정은 이미 수립됐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김 연구원은 "이번 논란은 결국 중국 내 생산기지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며 "앞으로 첨단 제품 생산을 중국에서 이어가기란 사실상 어렵고, 기업들은 규제 아래서 생산 가능한 품목으로 방향을 전환하거나 혹은 중국을 단계적으로 이탈하는 전략까지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국내 기업들은 이미 △대체 장비 확보 △국내외 생산 거점 다변화 △첨단 공정 내재화 등 다층적인 대응책을 추진 중입니다. 하지만 이번 조치가 실제 정책으로 구체화될 경우, 글로벌 생산 전략과 공급망 운영의 근본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점에서 파장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업계 한 관계자는 "VEU 폐지는 단순 행정 절차의 변화가 아니라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에서 기업의 전략적 입지를 어떻게 재조정할 것인지에 대한 신호"라며 "트럼프 행정부의 최종 방침과 이에 대응하는 각국 기업들의 전략이 향후 기술패권 경쟁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