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기술 주도권을 둘러싼 글로벌 경쟁이 메모리·비메모리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로 확산하면서 산업 구조 자체가 '국가 총력전' 체제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가 30년 만에 삼성전자를 제치고 D램 시장 1위에 오른 가운데 미국·중국·일본 등 주요국은 자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전폭적 지원을 앞세워 기술 격차를 줄이거나 다시 벌리기 위한 전투에 돌입했죠.
전문가들은 "이같은 격변기에 한국 정부의 전략적 개입과 정책 역량이 산업 경쟁력을 좌우할 변수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내부 경쟁 아닌 글로벌 재편의 시작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둘러싼 외부 압박이 한층 거세지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가 30년 만에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제치며 기술 주도권을 둘러싼 '국가 대 국가' 단위의 충돌이 본격화되는 양상입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올해 1분기 D램 매출 97억1800만달러, 점유율 36.0%를 기록해 삼성전자(91억달러·33.7%)를 앞질렀습니다. 앞서 카운터포인트리서치도 SK하이닉스가 우위를 점한 것으로 분석한 바 있는데요. 양대 시장조사기관 모두에서 삼성전자가 밀린 것은 약 3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업계에서는 이번 순위 역전이 단순한 수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 간 경쟁 구도를 넘어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구조적 전환을 예고하는 신호탄"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실제 미국 마이크론은 공세 수위를 더욱 높이고 있습니다. HBM3E 공급을 확대하며 점유율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한국 기업들이 강세를 보여온 프리미엄 제품군에서도 견고한 입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4일 공개된 저전력 D램 'LPDDR5X'입니다. 마이크론은 6세대 10나노급 공정 기반의 이 제품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보다 앞서 세계 최초로 고객사에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AI폰 시장 확대를 겨냥한 이 제품은 퀄컴의 차세대 스냅드래곤 칩과 함께 탑재될 예정입니다.
중국의 기술 추격도 거셉니다. 메모리 부문에선 창신메모리(CXMT)가 연내 HBM3 샘플 출하, 내년 양산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SK하이닉스가 사실상 독점 중인 HBM3E를 중국도 빠르게 따라잡고 있는 셈입니다.
비메모리 분야에선 SMIC가 5나노 시제품 개발을 추진 중이며, 화웨이와의 협업을 통해 3나노급 칩까지 내놓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리쉰커지는 6나노 기반의 PC용 GPU를 공개하며 한국과의 기술 격차를 좁혀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와 기술 압박에도 불구하고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세를 이어가는 중입니다.
일본의 반격 움직임도 뚜렷합니다. 키옥시아와 웨스턴디지털(WD)은 낸드플래시 시장 내 입지를 바탕으로 HBM, DDR5 등 고부가 메모리 시장 진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라피다스는 2027년 2나노급 파운드리 양산을 목표로 정부 및 글로벌 파트너와의 협업에 속도를 내고 있죠. 일본 정부의 대규모 보조금 지원과 민관 합작 모델 역시 향후 한국 반도체 산업에 적잖은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정책이 기술 이끈다…이재명 新정부의 선택
기술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이 국가 간 대결 양상으로 심화되면서 이를 뒷받침할 '국가 전략'의 중요성도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단순 몇몇 기업의 기술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국면에 접어든 만큼 각국 정부는 전방위적 지원과 생태계 조성에 본격 나서는 상황입니다. 한국 역시 민간 기업의 경쟁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과 인프라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반도체 산업 육성을 최우선 국정 과제로 내세워 왔는데요. 특히 파운드리와 시스템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강조하며, 첨단 패키징 인프라 구축과 팹리스-파운드리 협업 생태계 조성을 핵심 골자로 한 다수의 공약을 제시했습니다.
△차세대 AI 반도체 기술 개발 및 산업생태계 육성 △종합 반도체 생태계 허브 구축을 위한 시스템반도체 및 첨단패키징 지원 강화 △RE100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으로 수출·산업 경쟁력 제고 등 세부 과제가 그 예입니다.

정부가 파운드리와 첨단 패키징 중심의 산업 생태계 육성 전략을 내건 데 대해 전문가들은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는데요. 다만 공약 세부 내용을 들여다보면 아쉬운 지점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 뒤따릅니다.
무엇보다 업계가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직접 보조금'이나 '주 52시간제 유연 적용' 등 핵심 제도 개선 과제가 빠졌다는 점에서 정책 효과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우선 이재명 정부가 내세운 반도체 생태계 강화 방향에 대해 업계에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가 나옵니다. 송명섭 iM증권 수석연구위원은 "정부가 파운드리와 첨단 패키징 경쟁력 확보를 직접 주도하겠다는 방향성은 정책적으로 충분히 타당하다"며 "현재 한국이 TSMC에 밀리는 핵심 원인도 바로 이 기술 격차에서 비롯된다"고 짚었습니다.
그는 "TSMC가 애플, 엔비디아 등 글로벌 고객사의 첨단 패키징 수요를 독점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기술력 덕분"이라며 "이 부분을 정부가 보완하려는 시도는 전략적으로도 올바른 선택"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아울러 국내 팹리스 생태계가 겪는 구조적 병목 문제도 지적했습니다. 송 연구위원은 "그간 국내 팹리스 업체들은 양산성 부족 등을 이유로 파운드리 생산능력(Capa) 배정에서 늘 후순위로 밀려났다"며 "정부가 이들을 파운드리와 유기적으로 연결해줄 적절한 고리를 마련한다면 산업 생태계 전반에 숨통이 트일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정부와 기업 간 역할 분담이 명확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요. 이 교수는 "지금은 메모리냐 파운드리냐를 따질 때가 아니라 반도체 전체의 경쟁력을 지켜야 할 시점"이라며 "정부는 인프라 조성과 글로벌 고객사 유치에 집중하고, 기업은 기술 개발과 생산 역량 확보에 매진하는 이원적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중국의 기술 추격과 관련해선 "중국 정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빠른 속도로 집중 투자하고 있다"며 "한국 메모리 산업이 상당히 어려운 경쟁 국면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습니다. 이어 "HBM 기술 격차를 더욱 벌려야 할 시점이고, 파운드리에서도 TSMC와의 기술 격차를 반드시 줄여야 한다"며 "TSMC가 경쟁력을 확보한 건 생태계 전반의 유기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교수는 산업 생태계 전반의 보완 필요성도 강조했습니다. 설계·소부장 기업에 대한 연계 지원과 인력 양성이 병행돼야 한다는 겁니다. 그는 "현재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이원화된 구조로는 복잡한 산업 과제를 통합적으로 조율하기 어렵다"며 "전담 부처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컨트롤타워 구축이 시급하다"고 제언했습니다.
'정치 논쟁'에 멈춘 반도체특별법…현실적 해법은?
일각에선 새 정부의 반도체 공약이 산업계의 핵심 요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특히 업계가 꾸준히 요청해온 '직접 보조금' 지급 방안이 빠졌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는 평가입니다. 미국은 칩스법(CHIPS Act)을 통해 총 527억달러 규모의 보조금을 투입하고 있으며 중국도 10년간 140조원 이상을 쏟아붓고 있는 반면, 한국은 여전히 저금리 대출과 세액공제 등 간접 지원에 머물러 있다는 우려가 제기됩니다.
또 하나의 쟁점은 연구개발 인력에 대한 주 52시간제 유연 적용 미비입니다. 반도체는 일정에 따라 집중 근로가 불가피한 산업 특성을 지녔지만, 현행 제도상 연구 일정에 유연성을 부여하기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목소리입니다. 실제로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과거 "핵심 개발자들이 더 일하고 싶어도 제도적 한계로 발이 묶여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반면 주 52시간제가 국내 반도체 산업 경쟁력의 본질적 문제가 아니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이 교수는 "R&D 인력에 대한 보상체계를 강화하는 쪽이 더 실질적"이라며 "주 52시간은 노사 간 자율 협의를 통해 유연하게 풀 수 있는 문제이며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결정적 변수는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주 52시간제를 둘러싼 논쟁과 별개로 반도체특별법이 조속히 국회를 통과해 실질적인 기업 지원으로 이어지는 것이 우선 과제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현재 해당 법안은 국회에 계류된 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데요. '52시간제 예외' 조항이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되며 입법이 지연되는 상황 자체가 산업계에는 큰 부담이라는 설명입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반도체전문연구원은 "R&D는 반도체에 국한되지 않고 전 산업에 걸친 공통 영역"이라며 "굳이 반도체특별법에만 52시간제 예외 조항을 삽입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이 조항은 지난해 개정안 막판에 정치적 이유로 급히 삽입된 측면이 크다"며 "형평성 문제를 감안해 '노동법'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