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1차 벤더사(협력업체)이자 반도체 팹리스(설계 전문) 기업인 지니틱스가 경영권 분쟁에 휘말렸다. 대기업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이나 주요 주주간 대결이 아님에도 소수 지분만을 확보한 경영진과 30%가 넘는 지분을 확보한 대주주간 대결이란 점에서 업계 이목이 쏠린다.
막대한 지분 격차 외에 지니틱스 대주주가 중국 기업이면서 국내 반도체 기술 유출 관련 이슈로 확대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일각에선 국내 반도체 산업에 대한 중국 자본의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된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삼성전자 1차 벤더사로 입지 굳혀
지니틱스는 우리나라 반도체 팹리스 중소기업이다. 터치 컨트롤러 직접회로(IC), 카메라모듈, 웨어러블 전력기기 IC, 오디용 IC 등이 대표적인 제품이다. 스마트폰, 웨어러블 기기, 가전 등에 사용되는 제품을 생산해 내는 만큼 삼성전자의 1차 벤더사로 입지를 굳혀왔다.
이 회사의 전신은 2000년 설립된 세인정보통신으로 관련 분야에서 2004년 LG전자에 납품을 시작한 이후 본격적인 성장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2009년에는 나이스평가정보, 나이스신용평가 등을 핵심으로 하는 나이스그룹 산하로 편입됐다. 간편결제 관련 제품을 공급하면서 전자결제대행(PG)사인 나이스페이먼츠 등을 보유한 나이스 그룹이 이 부분에서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2012년에는 삼성전자 1차 공급업체로 부상하며 사업 포트폴리오를 넓혀 나갔고 변변찮던 매출은 급성장하기 시작, 2013년 적자를 탈출하기도 했다. 이후 나이스그룹은 동종 업계인 위더스비전을 합병시키며 이 회사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에 탄력받아 2019년엔 스팩(SPAC) 합병을 통해 코스닥 시장에 상장시켰다. 화웨이 등의 협력사로 선정되며 사업 영역 역시 해외로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이스그룹은 지니틱스를 포기했다. 매출은 우상향했지만 지속적인 연구개발(R&D) 비용이 들어가는 반도체 팹리스 산업의 특성상 매년 매출을 뛰어넘는 비용이 발생하면서 거의 매년 영업손실을 기록해서다. LG전자가 스마트폰 사업 등을 접으면서 거래가 끊긴 것도 타격을 줬다. 2019년 이후 지난해까지 이 회사가 영업이익을 낸 건 2021년(42억원)과 2024년(3억원) 단 두 해뿐이었다.
이후 나이스 그룹은 지니틱스 매각에 나섰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중국 자본이 손을 내밀었다. 중국 반도체 팹리스 기업 헤일로 마이크로일레트로닉스 인터내셔널(Halo Microelectronics International, HMI)은 지난해 8월 나이스그룹으로부터 이 회사의 지분 30.93%(약 210억원)를 인수했다.
HMI는 지니틱스 지분 인수 후 국내 상황에 정통한 전문가 등을 경영진으로 내세웠으나 최근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이들을 전부 해임하고 중국인으로 구성된 새 경영진을 앉히겠다고 나섰고 이에 현 경영진들이 반발하면서 경영권 분쟁 막이 올랐다.
경영권 분쟁…왜?
HMI는 지니틱스 지분을 인수한 이후 권석만 한국 지사장을 이 회사의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권석만 대표는 삼성전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다 키네틱 테크놀로지 한국지사장을 거쳐 2019년 HMI 한국 지사장을 지냈다. 표면적으로는 HMI 측 인사인 셈이다.
그러나 최근 권석만 대표를 필두로 하는 현 경영진과 최대주주인 HMI 사이에서 발생했다. HMI가 현 경영진을 모두 물러나게 하고 새로운 인사들로 경영진을 새로 구성하기 위해 임시주주총회 소집에 나서면서다.
지난 17일 지니틱스는 대주주 HMI의 요구에 의해 내달 9일 임시주주총회를 개최한다고 공시했다. 임시주주총회의 핵심 안건은 권석만 대표이사, 남인균 기타비상무이사, 장호철 사내이사, 박병욱 사외이사를 해임하고 새로운 경영진 8명을 신규선임하는 안건과 신주인수권 부여와 전환사채 발행과 관련한 정관을 수정하는 게 핵심이다. 경영진을 교체하고 지분과 밀접한 정관을 수정해 경영권을 공고히 하겠다는 게 골자다.
HMI가 내세운 경영진 교체 이유는 권석만 대표가 이사회 승인 없이 경쟁사에 겸직하면서 기술을 유출했다는 것이다. HMI는 현재 중국 본사가 개발 중인 신형 터치 컨트롤러 IC 프로젝트인 'HM5600' 내용과 일부 회사 장비를 권 대표 등을 포함한 현 경영진이 엘리베이션 마이크로시스템즈라는 회사에 유출했다고 주장한다.
권 대표측은 이에 대해 엘리베이션 마이크로시스템즈와 사무실을 같이 쓰는 과정에서 장비 등을 오인해서 생긴 문제라는 입장이다. 권 대표측 관계자는 "HM5600은 기획 단계에서 중단된 프로젝트로 특정 장비를 반출했다는 해일로 측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진짜 이유는 중국으로 기술유출?
일각에서는 이번 경영권 분쟁의 시초가 반도체 기술 유출 문제에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HMI가 지니틱스를 인수한 이후 핵심 기술을 본사로 이전하려고 했다는 거다.
현재 HMI와 지니틱스는 IC 관련 제품을 생산한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사업이 완전히 겹친다고 보기는 어렵다. HMI는 전력 공급이나 제어에 특화한 IC가 핵심이고 지니틱스는 터치, 제어, 인터페이스 등 사용 측면에 집중된 사업이 주된 영역이다.
관건은 HMI가 주력하는 사업 영역이 '중국 내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수익성이 악화하고 있다는 거다. 상하이증권거래소 자료에 따르면 HMI의 2023년 매출은 3억9360만위안(736억원)에서 2024년에는 5억4540만위안(1020억원)으로 늘었지만 영업손실 규모는 2023년 2억5960만위안(485억원)에서 2024년에는 3억2740만위안(612억원)으로 확대된 바 있다.
이에 HMI는 상대적으로 고부가가치 사업 영역에 진출한 지니틱스를 인수, 기술을 이전받아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대하려고 했다는 분석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권 대표를 필두로 하는 현 경영진이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는 평가를 받는 반도체 기술의 해외 유출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고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긴 HMI가 경영진 교체 카드를 꺼내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지니틱스가 가진 기술이 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전략 물자로 분류되지 않지만 반도체 산업 자체가 국가 안보와 직결됐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라며 "국내 반도체 기밀을 가장 많이 탈취해간 중국 기업에 관련 기술이 넘어가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고 지분을 인수한 HMI 입장에서는 이 부분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짚었다.
지난 2020년 미국이 중국에 대한 반도체 규제를 강화하자 중국 역시 반도체 기술을 내재화 하는데 집중했다. 이후 중국 자본이 본격적으로 국내 반도체 업계에 투입되고 있다는 게 이러한 분석의 근거다. 이와 관련 지난 2023년 중국의 토레드 홀딩스는 지2터치를, 같은해 동심반도체는 피델릭스의 지분을 사들여 최대주주의 자리로 올랐는데 당시 지분인수의 핵심은 사업 확장 보다는 해외 반도체 기술 확보를 위한 차원이었다는 분석이 나온 바 있다.
앞선 관계자는 "HMI가 지분 30%를 보유한 최대주주이긴 하지만 지니틱스 기술을 HMI로 이전하기 위해서는 이사회 동의가 반드시 필요한데 현재 이사회 내에서는 이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결국 이사회 장악 시도도 기술 이전을 위한 측면이 강하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고 덧붙였다.
지니틱스 핵심 관계사인 삼성전자에서 HMI로 기술이 넘어갈 경우 보안 강화 차원에서 거래를 끝낼 수 있다는 관측도 함께 나오고 있다.
업계 다른 관계자는 "벤더사가 단순히 제품을 납품하는 것에서 이제는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하고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삼성전자에서 어떠한 제품을 요구하느냐를 분석하고 이를 역추적할 경우 삼성전자의 핵심 전략이 외부로 노출 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가 나온다"라며 "과거 삼성디스플레이 핵심 기술이 국내 협력사를 통해 중국 BOE로 넘어간 것으로 확인됐고 이와 관련한 소송을 미국 등에서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미국이 중국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한 국제 정세를 고려하면 이번 분쟁은 국내 반도체 산업 전체 흐름에도 영향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