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들이 최근 잇달아 차입 한도를 확대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유동성 여력이 떨어지는 중형 증권사는 물론 대형사도 금융기관 차입이나 기업어음(CP) 발행에 대한 한도 등 단기차입 한도 설정액을 계속 늘리는 양상이다.
이는 아직 가시지 않은 대외 리스크에 선제적으로 대비하기 위한 차원으로 보인다.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 당시 유동성 경색의 직격탄을 맞은 경험에서다. 당시 증권사들이 신용보강을 했거나 매입을 보장한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산유동화 증권은 증권업계의 건전성을 위협한 바 있다.
11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하이투자증권은 지난달 31일 단기차입금 한도를 2100억원 늘렸다. 자기자본 대비 15.3%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세부적으로는 한국증권금융으로부터의 대출 한도를 기존 9800억원에서 1조1800억원으로 2000억원 증액했고, 당좌차월 한도도 5500억원에서 6500억원으로 100억원 확대했다.
하이투자증권은 작년 7월에도 CP와 전자단기사채 발행 한도 등을 총 1조1000억원 늘린 바 있다. 당시 증액은 2020년 3월 이후 2년여 만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기간이 8개월로 대폭 짧아졌다. 회사 측은 "자금시장 상황에 따라 안정적이고 탄력적으로 차입수단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DB금융투자 역시 대외 불확실성에 대한 대비 차원에서 지난 2013년 4월 이후 약 10년 만에 단기차입 한도를 확대했다. 지난달 14일 기존 5000억원이던 CP 발행 한도를 1조원으로 증액하고, 전자단기사채 발행 한도도 6000억원으로 1000억원 늘렸다. 이번에 높인 총 한도액은 6000억원으로 회사 자기자본의 57.3%에 이른다.
급전 한도를 확대한 건 중형 증권사들만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유동성 여력이 있는 대형사들도 최근 단기차입 한도를 키우고 있다.
하나증권은 지난달 23일 금융기관 차입 한도를 1조원 가까이 늘렸다. 모회사인 하나금융지주로 부터 원화 5000억원, 달러화 3억5000만달러 등 약 9575억원의 한도를 확대한 것이다. 이는 자기자본의 18%에 해당한다. 회사 측은 "원화와 외화 모두에서 안정적인 운영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설정한 것"이라며 "실제 대출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향후 시장 상황에 따라 차입금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전했다.
단기차입금은 금융기관 등 외부로부터 1년 이내 단기로 빌리는 돈이다. 차입 한도를 증액했다는 건 쉽게 말해 '마이너스 통장' 한도를 높인 것으로, 당장 증권사들의 대출금액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 때처럼 시장 유동성이 경색될 때는 증권사들이 급전을 마련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최근 이들 증권사가 단기차입 한도를 높이는 건 그만큼 향후 자금조달 시장이 녹록지 않을 것을 전제한 것이다. 금리 불안과 부동산 침체가 여전한 가운데 자칫 리스크가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뒀다고 볼 수 있다.
단적으로 지난달 말 기준 증권사들이 부동산 PF 신용보강으로 발행한 유동화증권(PF ABCP 및 ABSTB) 발행잔액은 18조7000억원으로 전체의 54%에 달한다.
주진혁 나이스신용평가 선임연구원은 "(부동산 침체로) 작년 하반기부터 본 PF로 이어지지 못한 착공 전 단계 유동화증권 상당수가 계속 만기연장이나 차환 발행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들 유동화증권은 현금화하기 어려운 부동산이나 채권에 대해 증권사가 보증을 서고 발행한 것이다. 만기가 닥쳤을 때 차환에 실패하면 증권사가 이를 떠안아야 한다.
정효섭 한국기업평가 책임연구원은 "자금조달 시장의 불확실성으로 증권업 전반에 유동성 관리 부담이 계속되고 있다"며 "아직 금리 상승기에 있는 와중에 부동산 경기 둔화로 PF 익스포저(위험노출)의 건전성이 저하되고 있어 일부 증권사에 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