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3월 시행하는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 개정안 여파로 상당수 가상자산(암호화폐) 거래소가 문을 닫을 전망이다. 가상자산거래 사업을 하려면 금융당국에 사업 신고를 해야 하나 신고 요건을 충족하는 거래소가 얼마 안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일부 대형 거래소를 제외한 대다수 중소 거래소들이 신고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대응 방안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관련 업계에선 특금법 개정을 계기로 가상자산에 대한 시장 및 당국의 잃었던 신뢰를 되찾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나무·코빗·빗썸·코인원 네곳만 신고요건 갖춰
내년 3월 25일부터 시행되는 특금법 개정안에 따라 가상자산(암호화폐)거래소들은 몇가지 요건을 갖추고 내년 9월까지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신고를 마쳐야 영업을 계속할 수 있다.
그동안 가상자산 거래소는 당국의 인허가나 신고 없이 통신판매업자나 전자상거래업자로 등록 하면 누구나 사업을 할 수 있었다. 관련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건전한 목적으로 사업을 하는 곳도 있으나 단기간 내 큰 수익을 거둘 목적으로 거래소를 여는 곳이 많았다. 시장의 신뢰를 업계 스스로 잃어버리게 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금융당국의 요구하는 가상자산사업자(VASP) 신고 요건을 충족하려면 'ISMS 인증'과 '실명확인 입출금 계좌 발급' 두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실명확인 입출금 계좌 발급을 위해서도 ISMS 인증이 필요하기 때문에 거래소들은 우선 한국인터넷진흥원(KISA)로부터 ISMS 인증을 받고 은행으로부터 실명확인 입출금 계좌 서비스를 위한 계약을 맺어야 한다.
ISMS 인증이란 기업이 고객 개인정보를 포함한 주요 정보를 보호할 수 있는 정보보호 관리 역량을 갖췄는지 평가하는 제도다.
가상자산 정보포털 업체 쟁글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운영 중인 거래소는 77개 가량이다. 이 가운데 ISMS 인증을 받은 곳은 7분의 1 수준인 11곳. 여기서 은행으로부터 실명확인 계좌를 발급받은 곳은 두나무와 코빗, 빗썸, 코인원 네곳에 불과하다. 이들 4개사만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제외한 다른 거래소들의 운명은 위태롭다. 두가지 신고 요건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정된 특금법 시행령은 지난달에 발표됐다. 아울러 두 요건에 대해서는 지난해 말 법안이 만들어질 때부터 공표된 사항으로 업체들 입장에선 약 1년간의 대비 기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ISMS 인증을 받으며 대비한 곳은 적지 않은 수준이나 결정적인 또 다른 요건인 실명확인 계좌를 받은 곳은 대형 4개사를 제외하고 없다. 실명확인 계좌를 받는 것은 다소 까다롭다. 객관적 기준 외에도 은행의 주관적 기준도 포함되어 있어서다.
특금법 실명계좌 발급 기준 요건 중 마지막 항목이 금융회사가 가상자산사업자의 자금세탁행위의 위험을 식별, 분석, 평가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사실상 은행의 판단에 맡기고 있어 은행들도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분위기다.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는 "개정된 시행령은 은행에 실명계좌 발급에 대한 판단을 맡기고 있어 만약 사고가 났을 경우 은행에도 공동책임이 있는 구조가 될 수 있다"면서 "이러한 공동책임 구조에서는 은행이 소극적 자세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거래장부 공유·트래블룰 준비도
가상자산거래소들은 거래장부(오더북) 공유 금지 부분에 대해서도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특금법 시행령에는 가상자산 사업자가 다른 가상자산 사업자와 제휴를 통해 자사 고객이 다른 사업자의 고객과 가상자산을 거래하는 행위를 못 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더북 공유는 국내 A거래소와 해외 B거래소가 각사의 고객들끼리 가상자산 거래가 가능하도록 한다. 오더북 공유는 거래량이 적은 중소거래소 입장에서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확인이 어려운 해외거래소와의 교차거래를 통해 자금세탁 위험성이 제기되면서 이와 같은 시행령을 추가했다.
이에 에어프로빗은 비트파이넥스와의 오더북 공유 제휴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바이낸스KR도 최근 서비스 운영 종료를 발표했는데 오더북 공유가 금지되면서 유동성 확보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사업을 철수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병준 에이프로빗 대표는 "특금법 시행으로 오더북 공유를 못하게 되면 많은 거래소들이 유동성 공급 부담과 거래량 감소 등 현실적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본다"면서 "에이프로빗도 부담이되는 상황이지만 가상자산 사업자 획득을 위한 가이드를 준수하고 철저하게 준비해 독자적 거래환경과 확장된 비즈니스를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적용기간이 1년 후인 트래블룰(Travel Rule)도 가상자산 사업자들에게 어느 수준의 부담이 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트래블룰은 가상자산을 전송하거나 거래할 때 거래소 등의 관련 가상자산업체들은 가상자산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수집해야 하는 내용을 담은 규제다.
가상자산사업자 간 정보 공유 시스템 구축을 위해 적용 기간을 1년 유예했지만 비사업자와의 트래블룰 적용 문제와 어느 수준까지 정보를 확인하고 검증해야 하는지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정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신뢰 구축할 수 있는 계기로
중소 가상자산거래소 업체 입장에서는 특금법 기준에 따르기 위해 여러 난제가 있으며 문을 닫을 위기에 놓여있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위험한 거래소를 피할 수 있는 첫 번째 기준은 마련되는 셈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특금법에 따라 당국에 사업 신고를 했다고 해서 '안전한 거래소'라는 인증을 받는 것은 아니다.
금융당국도 가상자산 제도화에는 선을 그었다. 금융위원회는 '특금법 시행이 가상자산 제도화를 의미하나'라는 질문에 "특금법은 국제기준인 자금세탁방지 금융대책기구(FATF) 권고에 따라 가상자산사업자에게 자금세탁방지의무를 부과하는 것일 뿐 제도화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자금세탁방지의무는 가상자산을 거래하거나 보관하는 고객 확인 의무와 의심거래보고 의무 등을 의미한다. 또 제도권은 설립 인허가, 자본금 규제, 영업행위 규제, 투자자 보호 등을 의미한다.
엄밀하게 보면 특금법은 자금세탁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며 투자자 보호를 위한 법은 아니다.
하지만 ISMS 인증을 받고 은행으로부터 실명계좌 발급 서비스를 위한 계약을 맺는 등의 노력을 통해 '사기' 목적이나 단기간 큰 수익만을 위해 운영했던 거래소는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생긴 셈이다. 사용자가 거래소를 이용할 때 FIU에 신고가 된 거래소인지 확인하는 절차는 필요하다.
관련 업계에선 이번 특금법으로 금융당국과의 신뢰 구축을 다져나가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가상자산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는 과도기를 지나면서 어느 정도 성숙됐지만 당국과의 신뢰가 아직 미진하다"면서 "이번 특금법 개정안이 시행되고 문제없이 정착되면 향후 당국과의 신뢰 구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