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주스를 포장한 상자의 표면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비추자 눈에 보이지 않던 'ORIGIN(정품)' 마크가 화면에 떴다. 홀로그램처럼 각도에 따라 정품, ORIGIN 등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났다.
한국조폐공사의 위변조 방지기술은 화폐뿐 아니라 정부 공문서, 화장품 포장상자, 다이아몬드 품질보증서에 이르기까지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기술 탄생의 중심엔 오창진 한국조폐공사 보안디자인팀장이 있다.
오 팀장은 각종 발명행사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상, 국무총리표창을 휩쓴 위변조 방지기술 분야의 최고 권위자다. 올해 발명의 날에는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실생활 곳곳에 적용…해외수출도
그가 위변조 방지기술에 관심을 가진 건 2010년 무렵이다. 특히 문서를 복사할 경우 경고문구가 드러나는 복사방해패턴이 눈에 들어왔다. 원본을 복제하면 그 복제품에 '사본' 등의 문구가 뜨는 기술이다.
오 팀장은 "당시 일본의 복사방해패턴을 보고 이를 보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독자적인 복사방해패턴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며 "우연히 개발한 결과물인 '고스트씨'의 성능이 괜찮아서 발명특허대전 금상을 탔고 그 뒤로 이 분야에 재미를 붙였다"고 말했다.
그가 발명한 위변조 방지기술은 크게 세 가지다. 공문서 무단 복제를 방지하는 복사방해패턴 '고스트씨', 스마트폰을 통해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보안패턴을 확인하는 '스마트씨', 스마트씨보다 인쇄 단가가 저렴한 기술인 '스마트정글'이 그것이다.
오 팀장은 "고스트씨의 경우 공문서를 복사하기 전까지 진짜와 가짜 여부를 알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스마트폰 카메라로 진위여부를 볼 수 있는 스마트씨를 개발했다"고 설명했다. 스마트씨 적용 여부는 한국조폐공사가 개발한 앱인 '수무늬'를 열고 카메라를 실행하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또 "스마트씨는 비닐 등의 재질에 결과물을 출력하는 '그라비아 인쇄' 기법을 쓰기 때문에 단가가 비싸다"며 "스마트정글은 종이 위에 일반적인 컬러 인쇄를 하는 것처럼 출력할 수 있어 스마트씨보다 저렴하다"고 말했다.
그라비아 인쇄는 오목하게 홈을 판 인쇄용 동판에 잉크를 묻힌 뒤 홈에 고인 잉크를 비닐에 출력하는 방식이다. 동판이 고가인데다가 스마트씨 기술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포장 디자인 인쇄 후 보안패턴을 한 번 더 뽑아야 하기 때문에 단가가 비싸다. 반대로 스마트정글은 1회 인쇄로 포장 디자인과 보안패턴을 동시에 출력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스마트정글에는 보안패턴 외에도 상품별로 다른 제품번호를 인쇄하는 '리얼코딩' 기법도 적용돼있다. 짝퉁을 막는 이중 걸쇠를 건 셈이다.
그의 기술은 화장품을 담는 상자를 비롯해 각종 설명서와 정품 보증서 등 실생활에 녹아 있었다. 조폐공사의 위변조 방지기술은 해외에서도 쓰이고 있다. 오 팀장은 "대표적인 수출 대상국은 파푸아뉴기니"라며 "파푸아뉴기니 정부가 배포하는 출생증명서, 결혼증명서 등의 공문서에 조폐공사의 기술을 적용했다"고 했다.
착시효과 이용한 위변조 방지기술
정품 인증 마크를 숨기는 원리는 착시효과에서 나왔다. 오 팀장은 이를 '에어리어 이팩트(Area Effect)'라 불렀다.
오 팀장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인식부'는 면적대비가 크고 비인식부는 면적대비가 작다"며 "어느 정도 면적이 줄어들면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지 비율을 계산해 특허로도 등록한 상태"라고 말했다. 면적대비는 같은 색이어도 면적이 넓으면 밝고 선명하게 보이고, 반대로 면적이 좁으면 어둡고 진해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이 현상을 이용해 눈에 보이지 않게 정품 인증 마크를 숨기는 것이다.
국가별로 위변조 방지기술의 구현법도 달랐다. 오 팀장은 "일본의 복사방해패턴은 쉽게 말해 노란 모래사장 위(인쇄지)에 회색 자갈처럼 특이한 걸 올려뒀다고 생각하면 쉽다"며 "이 기술을 적용한 종이를 복사하면 그 문양이 드러나 진품과 가품을 구분하는 원리"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기술은 머리카락 굵기로 빗댔다. 그는 "얇은 머리카락과 두꺼운 머리카락을 무작위로 섞으면 어떤 것이 굵고 얇은지 육안으로 구분하기 어렵다"며 "이 원리를 이용해 진품을 복사하면 얇은 머리카락 역할을 하는 사본 마크가 보여서 진짜와 가짜를 가릴 수 있다"고 말했다.
기술적으로는 복사방해패턴이 있다는 걸 눈에 띄게 하는 것(일본)보다 알아차릴 수 없도록 하는 게(한국) 더 뛰어나다고 한다.
'왜?' 다섯 번의 질문
꾸준히 기술을 개량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비결엔 '창과 방패'의 대결이 있었다.
오 팀장은 "새로운 위변조 방지기술을 개발하면 '이거 뚫는데 얼마나 걸리겠어?'라며 팀원들끼리 기술의 허점을 찾고, 그에 따른 방어책을 찾으면서 우리 기술을 보완하기 위해 파고든다"고 말했다.
오 팀장이 위변조 방지기술을 발전시켜 온 데는 그만의 차별화된 업무습관이 있다. 그는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왜?'라는 질문을 다섯 번 연속으로 던진다. 이른바 '5Why' 기법이다. '고스트씨→스마트씨→스마트정글'로 업그레이드가 이뤄진 것도 '왜?'라는 질문을 계속해 던진 결과물로 볼 수 있다.
그는 "세계 최초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체요절'을 비롯해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등을 보유한 우리나라는 인쇄 강국이었다"며 "선조의 뛰어난 업적을 이어 인쇄 보안기술을 계속 발전시키고 선도하는데 일조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