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권이냐 브랜드 가치냐'
건설사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하이엔드 브랜드 때문인데요. 여러 아파트 브랜드 중 디에이치(현대건설)나 아크로(DL이앤씨), 써밋(대우건설)과 르엘(롯데건설) 등 서울 강남권 일부 단지에서만 볼 수 있었던 하이엔드 브랜드를 이제는 서울 강북권을 넘어서 지방에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건설사들의 고민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지역에 따라 브랜드를 차별해선 안 되겠지만 회사를 대표하는 하이엔드 브랜드인 만큼 각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단지에만 상징적으로 달고 싶은 게 건설사들 속마음입니다.
반대로 해당 아파트 입주 예정자(조합원, 수분양자 등)들은 일반 브랜드보다는 하이엔드 브랜드를 원합니다. 하이엔드 브랜드를 달면 이른바 명품(고급) 아파트로 인정받는 셈이고, 이를 통해 지역의 랜드마크 단지로 거듭나 자산가치(집값)도 훨씬 더 상승할 것이란 기대감이 있어서죠.
최근에는 정비사업(재건축‧재개발)을 추진하는 다수의 조합들이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건설사들에 하이엔드 브랜드를 요구하는 상황입니다.
하이엔드 달아주세요!
최근 일부 정비사업 조합들이 하이엔드 브랜드 적용과 관련된 갈등을 이유로 기존 시공권을 해지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지난달 신당8구역 재개발조합은 시공사인 DL이앤씨와의 계약을 해지했는데요. 이 회사 하이엔드 브랜드인 '아크로' 적용 여부를 놓고 이견이 발생한 탓이죠.
지방에서도 대전 유성구 장대B구역이 기존 시공사인 GS건설에 계약 해지를 통보하고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건설사를 찾아 나선 상태입니다.
북가좌6구역은 하이엔드 브랜드의 중요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업장입니다. 이 사업장 시공권을 두고 DL이앤씨와 롯데건설이 경쟁을 펼쳤습니다. 롯데건설은 하이엔드 브랜드인 '르엘'을 사용하기로 했던 반면 DL이앤씨는 '드레브 372'라는 새로운 단지 명을 내세웠는데요. 조합원들 사이에서 하이엔드 브랜드 적용에 대한 요구가 커지자 '아크로'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워 DL이앤씨가 시공권을 따냈습니다. ▷관련기사: [집잇슈]DL이앤씨 아크로 덕에 '북가좌6' 얻고, 잃은 것은?(9월2일)
이와 함께 대형 건설사들이 시공권 확보를 위해 각축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되는 노량진뉴타운 내 1‧3‧5구역 등도 하이엔드 브랜드를 적용, 고급 주거단지로 탈바꿈하겠다는 조합원들의 기대가 큰 상황입니다. ▷관련기사:[집잇슈]노량진뉴타운, 환골탈태…아크로·디에이치 등 '기대'(9월8일)
달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건설사들은 내부적으로 10여개의 기준을 두고 하이엔드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다 공개할 순 없지만 단지 규모와 입지, 공사비, 랜드마크 가능성 등이 중요한 요인이라고 하는데요. 일반 브랜드와 차별화를 통한 하이엔드 브랜드만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나름 철저하게 기준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게 건설사들의 공통된 설명입니다.
기본적으로 하이엔드 브랜드가 적용되는 단지는 설계부터 단지 조경, 마감재까지 일반 브랜드 단지와는 차이가 크다는데요.
하이엔드 브랜드 단지는 특화설계로 단지와 단지를 연결하거나 화려한 문주를 적용하기도 합니다. 단지 조경 역시 수천만원에 달하는 나무를 심고 수석 등으로 꾸미는 게 대표적이죠. 바닥재와 창호, 조명 등 마감재들도 고급 제품으로 해 공사비 자체가 비쌉니다.
건설사들 입장에선 공사비가 더 들어가더라도 자사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그 동안 강남 등 주요 단지에만 하이엔드 브랜드를 적용해 왔습니다.
대형 건설사 한 관계자는 "사업장 규모 등 변수가 많아 명확한 숫자를 제시할 순 없지만 하이엔드 브랜드 단지는 고급화가 중요해 공사비가 일반 브랜드 단지보다 많이 비싼 것은 사실"이라며 "그 동안 강남권 재건축 등 미래 가치가 높은 단지에는 수익을 좀 줄이더라도 하이엔드 브랜드를 적용해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갈수록 하이엔드 브랜드 가치를 유지하기 어려워 건설사들을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데요. 정비사업에 대한 규제 강화로 주요 먹거리인 주택사업, 특히 서울 등 수도권 주요 도심에서 시공권을 확보할 만한 사업장이 많지 않아 경쟁은 갈수록 심해집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건설사들은 수주를 위해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고요. 무엇보다 조합원들의 선택을 받으려면 하이엔드 브랜드를 달아달라는 그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수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이곳저곳 모두 하이엔드 브랜드를 달자니 특정 고급단지에만 적용해 희소 가치를 높이려던 운영 방침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곧 브랜드 가치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이엔드 브랜드가 갖고 있는 고급 주거단지라는 이미지 역시 퇴색될 수 있고요.
건설업계 내부에서도 이러다 또 다른 하이엔드 브랜드를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고 합니다.
또 다른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그 동안 힘들게 쌓아온 브랜드 가치를 훼손하면서 (시공권 확보를 위해)하이엔드 브랜드를 적용해야 하는지가 딜레마"라며 "하이엔드 브랜드를 여러 단지에 적용하다보면 브랜드 가치가 떨어질 것이고, 결국 새로운 하이엔드 브랜드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 상황까지 초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걱정하네요.
이와 관련 건설업계 관계자는 "하이엔드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면 기존(일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게 중요하다"며 "브랜드 리뉴얼 등을 통해 하이엔드 브랜드가 일반 브랜드보다 떨어지는 게 아니라 그 브랜드만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어야 두 브랜드를 함께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