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일선에 나선 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올 한해를 회고하면서 던진 말이다. 18일 서울 잠실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에서 계열사 대표 42명을 포함해 총 60여명의 임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사장단회의에서다. 그의 마음 속에는 싱크홀과 건물안전 논란으로 그룹의 숙원사업인 제2롯데월드 사업이 좌초할지 모른다는 의기의식이 크게 자리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 답답했던 신 회장 "반성 많이 했다"
신 회장이 언급한 "경영일선에 나선 시기"가 그룹 회장직을 맡은 2011년 이후를 가리킨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가 롯데그룹에 몸을 담은 건 26년 전인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 회장은 노무라증권 런던지점에 있다가 일본 롯데상사에 입사했다. 한국에선 1990년 호남석유화학 상무로 경영활동을 시작해 1997년 부회장을 달았다.
그룹경영의 전반적 실무를 지휘한 건 10년전인 2004년 롯데정책본부 본부장 자리를 맡았을 때로 볼 수 있다. 거화취실(去華就實·화려함을 버리고 실속을 추구한다는 뜻)을 강조하는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 밑에서 20년 가까이 경영수업을 받은 뒤 그룹 컨트롤타워인 정책본부의 수장으로 앉았다. 지난 2006년 롯데쇼핑을 상장하고 국내외 기업을 인수합병(M&A)하며 지금과 같은 외형을 갖춘데에는 당시 정책본부장을 맡았던 신 회장의 역할이 컸다.
그랬던 신 회장은 이날 "우리 위상에 대한 반성을 많이 한 시기였다"고 고백했다. 경영수업기간까지 포함해 20년 이상을 몸바쳐 롯데그룹을 재계 5위로 키워낸 그였지만 올해는 일이 마음 먹은대로 풀리지 않았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룹에 대한 외부의 기대치는 높아지는데 그를 충족시키지 못한 조직 내부역량에 아쉬움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 "외부 탓 말라" 경고메시지
신 회장은 계열사 대표들에게 유교경전인 '맹자(孟子)'에 나오는 구절을 소개했다. '청사탁영 탁사탁족(淸斯濯纓 濁斯濯足)’이라는 문구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뜻으로, 갓끈을 씻는 물이 될지 발을 씻는 물이 될지는 물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쉽게 말해 일이 잘 안풀린 건 그 일을 한 본인 탓이라는 얘기다. 신 회장이 굳이 이 말을 계열사 대표들에게 한 것은 각자가 스스로를 되돌아보라는 경고메시지 성격이 짙다.
신 회장은 지난 6월 열린 사장단 회의에서도 "그간 온 정성을 다해 쌓아왔던 공든 탑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며 그룹 임원들에 대한 실망감을 나타낸 바 있다. 전현직 임원이 연루된 롯데홈쇼핑의 납품비리를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이날도 "대표이사들이 모범이 되어 문제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지 말고 초심을 다시 떠올려 달라"고 주문했다. 표현 자체는 완곡했지만 경영부진이나 사업차질, 그동안의 관행을 외부 탓으로 돌리는 임원들은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한 것으로 그룹 내부에서는 해석하고 있다.
신 회장의 경고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오는 12월 그룹 임원인사에서 확인할 수 있을 전망이다. 롯데그룹은 매년 2월 실시한 임원인사를 올해는 두달 앞당겨 12월에 진행할 예정이다. 신 회장이 직접 지시해 인사시기를 앞당긴 것으로 알려졌다. 신 회장은 제2롯데월드 안전사고, 롯데홈쇼핑 납품비리, 롯데카드 개인정보 누출 등 각종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자 내년까지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지 않도록 연말 인사를 결정했다. 롯데 관계자는 "인사폭이 얼마나 될지 알려진 것은 없다"며 "잠을 설치는 임원들이 꽤 되지 않겠냐는 정도의 얘기만 돌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