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와중에 쌍용건설과 STX조선해양이 채권단의 딜레마로 떠올랐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들어가는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지만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한 탓이다. 두 기업 모두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상징성도 만만치 않아 금융당국과 채권단의 구조조정 의지를 가늠할 수 있는 시험대가 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그동안 시장에서 유동성 위기설에 시달리던 주요 대기업들은 나름대로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고 있다.
동부그룹이 동부하이텍을 비롯한 핵심 계열사 매각에 나서면서 깃발을 들었다. 동부그룹은 특히 재무적 투자자(FI)가 주인인 특수목적회사(SPC)에 자산을 통째로 판 뒤 SPC가 차례로 자산을 재매각하는 방식을 활용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룹은 현금 유동성을 단시간에 확보할 수 있고, 채권단도 자산 매각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동양그룹처럼 시간을 끌다가 구조조정 타이밍을 놓치는 부작용을 차단하면서 시장엔 구조조정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장점도 있다.
그러자 현대그룹과 한진해운도 동부식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나섰다. 특히 현대그룹은 회사채 신속인수제를 신청하면서 자존심을 구긴 데 이어, 그동안 매각은 절대 없다던 현대증권까지 팔 수 있다는 입장을 공식화하면서 구조조정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영구채 발행에 실패한 한진해운은 한발 더 나갔다. 채권단의 대출과 대한항공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은 사실상 경영권 포기 수순을 밟고 있다. 급한 불을 끈 뒤엔 SPC를 통한 비핵심 자산 매각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금융당국과 채권단, 고강도 구조조정 압박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대기업들이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고 있는 이유는 상황이 다급하기도 하지만 금융당국과 채권단의 의지가 그만큼 강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특히 동양사태를 계기로 회사채 불완전판매에 따른 사회적 파장이 커지면서 구조조정 압박은 더 거세지고 있다.
실제로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지난 국정감사에서 “이번 정부에서 부실 대기업을 정리하고 간다”고 못 박았다. 최수현 금융감독원장도 “엄격한 기업 구조조정”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쌍용건설 구하기도 사실상 중단했다. 금융위는 올초 채권단을 설득해 법정관리 위기로 내몰린 쌍용건설을 워크아웃으로 돌린 바 있다.
채권단도 고강도 구조조정을 주문하면서 맞장구를 치고 있다. 현대상선은 애초 1조원 규모의 자구 계획을 마련했지만 채권단이 거부해 결국 현대증권까지 매각 대상에 올려놨다. 한진해운 역시 영구채 지급보증이 퇴짜를 맞으면서 대한항공의 지원은 물론 최은영 회장의 경영권 포기 결단을 이끌어냈다.
◇ STX조선해양과 쌍용건설, 구조조정 의지 가늠자
하지만 STX조선해양과 쌍용건설은 여전히 딜레마다. STX조선해양은 말 그대로 돈 먹는 하마다. 채권단은 이미 지난 7월 STX조선해양에 3조 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단일 기업 기준으론 단군 이래 최대 규모다.
하지만 대규모 우발채무가 새롭게 나오면서 추가로 2조 원 가까이 더 넣어야 할 처지가 됐다. 채권단은 내년에 투입할 신규 자금을 우선 지원하기로 했지만, 추가 지원 여부는 여전히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쌍용건설도 올해 워크아웃에 돌입하면서 5000억원 규모의 출자전환과 함께 신규 자금지원을 추진했다. 하지만 군인공제회의 공사계좌 압류와 함께 추가 자금 지원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역시 난관에 부딪혔다.
STX조선해양과 쌍용건설은 채권단의 구조조정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잣대가 될 전망이다. 그동안 천문학적인 자금을 지원한데다, 두 기업 모두 한국 경제 전반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만만치 않은 반면 회생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채권단간 갈등도 커지고 있다. 그동안 대기업 살리기를 독려하다가 갑자기 발을 빼고 있는 금융당국의 책임론도 거론된다. 구조조정 대상 기업 관계자는 “채권단의 의견이 엇갈리면서 구조조정에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늘고 있다”면서 “구조조정의 무게중심이 채권단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