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 수장이 바뀌면서 네이버와 카카오를 비롯한 빅테크와 핀테크 플랫폼에 열렸던 금융권 장벽이 다시금 높아지는 모양새다.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그동안 혁신금융에서 '혁신'에 방점을 두고 금융의 문을 열어줬던 정책 기조를 '금융'의 입장에서 재점검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에 따라 빅테크의 본격적인 보험업 진출을 앞두고 업권간 표정도 엇갈릴 전망이다.
"플랫폼 경제 확산…보험권 '대응' 돕겠다"
지난 3일 고승범 위원장은 보험업계 수장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취임 후 보험업계와 단독으로 만나는 첫 자리였다.
고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코로나19 사태 시작 8주 만에 '비즈니스 디지털 전환'이 5년 앞당겨졌다고 한다"면서 "금융의 디지털 전환과 플랫폼 경제 확산에 대응해 보험상품의 보장 범위, 보험 모집, 보험금 지급, 고객응대 방식까지 모든 프로세스를 재점검하겠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정부가 보험업권 변화와 혁신 노력을 전폭 지원하겠다"라고도 언급했다.
핀테크, 플랫폼 기업 등 혁신기업을 금융권으로 받아들여 기존 금융권에 혁신이라는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려던 이전의 방침에서 금융사를 중심으로 자체적 디지털 대응 능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초점을 바꾼 모습이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금융위, 금감원 수장이 모두 바뀐 이후 빅테크를 비롯해 핀테크 쪽에 관대하게 기울었던 당국의 방향성이 반대로 바뀐 것은 맞다"라며 "이전과는 태세가 완전히 변했다"라고 말했다.
당국의 스탠스가 변화함에 따라 보험권의 플랫폼 규제 방안을 내놓으려던 정부 추진 일정도 내년으로 미뤄졌다. 고 위원장 취임 후 전반적인 재점검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빅테크 문 좁히고, 보험사에는 당근 제시
당초 금융위는 9월 초 보험권을 통해 빅테크와의 협업 내용을 파악하고 추석 전 보험권 플랫폼 규제를 위한 공청회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빅테크, 핀테크에 금융권의 문을 열어줬지만 금융규제는 금융사만 대상으로 하고 있어 규제 공백으로 소비자가 피해를 볼 수 있는 부분들을 걸러내기 위한 취지였다. ▷관련기사 : [인슈어테크 살아남기]②마이데이터 '기회' 플랫폼 규제 '악재'(8월9일)
그러나 고 위원장 취임 후 금융위는 소비자들의 금융 플랫폼 실태를 다시 점검하고 있다. 빅테크, 핀테크 기업의 보험업 진출에 맞서 보험사 입장에서 어떤 대비가 필요한지 먼저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공청회 일정도 내년으로 미뤄졌다. 이 같은 시각 변화는 향후 방향성에 매우 다른 양상을 가져올 수 있다.
실제 고 위원장은 이날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으로 가로막힌 빅테크와 마이데이터 사업자의 '보험상품 비교·추천 서비스' 해법인 플랫폼의 보험대리점(GA) 허용과 관련해 "제도 도입에 있어 상품비교 의무, 수수료 체계 등 소비자보호 측면에 주안점을 두겠다"라고 밝혔다. ▷관련기사 : [답없는 금융규제]②인슈어테크 고사 위기, 빅테크도 부글부글(10월22일) [답없는 금융규제]①금소법 유탄 마이데이터…당국은 핑퐁게임(10월21일)
본래 온라인 플랫폼의 GA 허용 계획은 금융위가 올해 초 보험산업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플랫폼을 활용한 금융서비스 혁신 지원' 방안으로 제시한 내용이었다.
플랫폼 기반의 서비스 혁신을 확대한다며 진입 규제 개선안을 내놓은 것인데, 보험사 입장에서 우려사항을 걸러내는 데 주안점을 두겠다는 고위원장의 발언은 사실상 취지를 뒤집었다고 볼 수 있다. "플랫폼 기업(빅테크)과 관련해 '혁신을 위축하지 않는 필요 최소한의 규율'을 마련할 것"이라는 금융위와의 방침과도 온도차가 있다.
그동안 빅테크에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며 불만을 내비쳤던 보험사들에 여러 당근책도 제시했다.
고 위원장은 빅테크 등 플랫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낮은 보험사들의 앱 접근성을 높일 수 있도록 보험사의 오픈뱅킹 참여를 허용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보험사 플랫폼에서 계좌 조회, 이체까지 가능하도록 마이페이먼트(지급지시전달업) 허용도 검토하겠다는 계획이다.
온라인 채널에만 일부 열렸던 '1사 1라이선스' 허가정책도 더욱 유연하게 적용하기로 했다. 1사 1라이선스란 한 회사에 보험업 인가를 하나만 부여하는 제도다.
앞으로는 상품별·채널별·고객별로 차별화가 필요한 사업모델에 대해선 이 원칙을 완화해주겠다는 얘기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한 플랫폼의 진격에 대비해 다른 채널로 통로를 넓혀주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금융권 일각에서는 최근 고 위원장이 연이어 금융권역 장벽을 허무는 발언들을 내놓자 금융업권 간 갈등을 조장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묶여있던 헬스케어 드디어 빗장 풀리나?
오랜 기간 묶여있던 헬스케어 빗장이 풀릴지에 대한 기대감도 키웠다.
고승범 위원장은 "헬스케어는 보험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라며 "정부가 경쟁력 있는 플랫폼이 되도록 여건을 조성하겠다"라고 밝혔다.
이어 "플랫폼 기반 토털 헬스케어 서비스 제공에 필요한 선불전자지급업무 등 신사업과 관련 있는 경우 겸영·부수업무로 폭넓게 인정하겠다"라며 "헬스케어 종합금융플랫폼으로의 성장을 지원하겠다"라고 강조했다.
해외 보험사들은 적극적으로 헬스케어 분야 확대에 나서고 있는 반면 국내에선 보건의료 관련 법안과 부딪히며 진전이 없자 적극적인 지원 방침을 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활용이 제한적인 건강관리 상담·실천 프로그램에서 벗어나 다양한 헬스케어 서비스를 출시할 수 있도록 △회사 신고기준을 폭넓게 마련하고 △조인트벤처 설립 등 헬스케어 스타트업 투자 지원 방침을 밝혔다.
복지부와 협의해 여전히 벽이 높은 공공의료데이터 활용과 비의료가이드라인 개정을 통해 AI(인공지능)·빅데이터를 통한 건강상태 분석, 질병위험도 예측 등 헬스케어서비스도 확대해준다는 방침이다. ▷관련기사 : 보험 공공의료데이터 '심평원은 되고 건보는 안된다?'(8월31일)
보험업계 골칫거리인 실손보험과 관련해선 '지속가능한 실손보험 정책협의체‘를 출범하고, 감염병과 자연재해, 자율주행 등 신기술에서 파생될 위험보장 사각지대 해소에도 나선다는 계획이다.
보험대리점(GA)의 판매책임 강화안 마련과 온라인 플랫폼 보험대리점에 대한 업계 의견도 경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험업계는 환영한다는 반응이다. 다만 규제 유연화 허용 범위가 간담회에서 구체적으로 다뤄지지 않았고,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나 헬스케어 등 부처 간 협의가 필요한 내용들의 경우 몇 년간 공회전을 거듭해온 만큼 고 위원장이 특별한 해법을 내놓을 수 있을지는 아직 반신반의다.
반대로 빅테크, 플랫폼 기업들은 달라진 당국의 모습에 울상을 짓고 있다. '동일규제'를 적용하겠다는 당국의 말도 금융사들에만 평등하게 적용하겠다는 것이냐는 볼멘 목소리도 나온다.
고 위원장이 대대적인 점검을 마치고 내년 플랫폼 규제 방향을 어떻게 잡을지도 지켜봐야 할 부분이다.
보험업계 한 전문가는 "디지털 전환, 플랫폼의 금융업 진출은 피할 수 없는 문제로 이에 따라 새로운 규제 마련은 필수적"이라면서도 "기존 규제의 허점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는 만큼 금융권 혁신을 바랐던 빅테크, 플랫폼에 일률적인 규제를 들이댈 경우 '혁신'을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