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이 길고 긴 '인사 대장정'을 끝냈습니다. 지난해와 올해 금융권 최고경영자(CEO)들의 임기 종료가 연이어 예고돼 있었죠. 지난해 가을부터 무르익었던 금융권 최고인사들의 '인사철'이 지난 3일 우리금융지주 회장 추천을 끝으로 얼추 종료됐습니다.
특히 올해에는 예년과 다른 모습이 줄곧 연출됐습니다. 연임 가능성이 높다고 점쳐졌던 주요 CEO들은 자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경영의 연속성'을 필요로 '장수 CEO'들을 배출했던 금융권이 올해에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자의 반 타의 반' 세대교체가 이뤄진 겁니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금융당국 수장들이 금융회사 CEO 선임에 '한 마디'씩 보태면서 관치금융 논란이 가중됐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가을부터 이어진 금융권 CEO 인사가 남긴 것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장수 CEO, 이제는 없다'…세대교체 본격화
'금융사 CEO들이 중장기 경영전략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금융권 안팎에서 이런 목소리에 힘이 실렸죠.
통상 3년으로 제한된 임기 내에서는 제대로 된 경영을 펼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임기가 3년으로 짧다 보니 당장의 성과에만 급급해 중장기적인 전략을 펼치지 못한다는 게 그 근거였고요.
특히 외국계 금융사 CEO가 10년에 가까운 임기를 지키며 회사를 경영해왔던 것과 크게 비교됐습니다. 10년이 넘는 기간 씨티은행을 이끈 하영구 전 은행연합회장, 그 뒤를 6년째 이은 박진회 전 씨티은행장이 대표적입니다. 박종복 SC제일은행장 역시 7년째 은행을 이끌고 있습니다.
국내 금융지주도 장기집권 사례가 나왔죠. 김정태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4연임(10년)했고요,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도 3연임에 성공해 현재까지 만 8년 넘게 KB금융지주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에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도 합류할 것이란 관측이 우세했습니다. 회장을 지내는 동안 순익을 크게 끌어올리는 데에도 성공했고 적극적인 M&A를 통해 비은행 계열사를 확대해 전 금융업을 아우르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꾸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용병 회장은 스스로 3연임에 도전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제는 후배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진옥동 전 신한은행장이 물려받기로 했습니다.
조 회장뿐만 아니라 좋은 실적을 낸 다른 금융지주 회장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손병환 농협금융지주 회장 역시 연임에 성공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났죠. 현재 농협금융지주는 재무 관료 출신 이석준 회장이 이끌고 있습니다.
다른 금융사 CEO들도 각자의 사정으로 줄줄이 연임을 포기했습니다. 김지완 전 BNK금융지주 회장이 자리에서 물러났고,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도 연임 도전을 접었죠.
비워진 자리는 '새 얼굴'로 채워졌습니다. 결과적으로 금융권에서는 올해 유독 '세대교체'가 많았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찝찝한 이유…금융당국의 '입'
하지만 기대감을 품을 '세대교체'라기엔 불편함이 적잖습니다. '관치금융'의 영향이 더 컸다는 이유 때문이죠. 금융당국 수장들이 유독 CEO 선임에 직접적으로 의견을 내보이면서 풍향계가 오락가락했던 인사철이었습니다.
지난해 가을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국정감사에서 일부 금융지주 CEO의 자질에 대한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금융당국으로부터 징계를 받은 금융회사 CEO가 그 직을 유지해도 되냐는 지적이었습니다. 이후 금융당국 수장들은 금융회사 CEO의 '자질'을 입에 올렸죠.
김주현 금융위원장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여러 자리에서 수 차례 금융권 CEO 인사와 관련해 의견을 냈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핵심은 "징계를 받은 이력이 있는 인사가 금융회사 CEO에 오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4대 금융지주 회장 중 금융당국으로부터 징계를 받지 않은 CEO는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이 유일했습니다. 함영주 하나금융지주 회장의 경우 지난해 임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이번 금융당국의 레이더에서는 벗어났지만 임기를 코앞에 둔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과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은 '타깃'이 됐습니다.
민간 금융회사 CEO가 금융당국으로부터 중징계 이상을 받은 경우 임기가 종료된 이후 3~5년간 금융권 재취업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금융회사 CEO가 나서 징계가 적절했는지 여부는 법원에서 따져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는 개인의 방어권 보호 차원에서 적절성 문제가 있습니다. 금융당국이 징계를 수용할지 말지를 거론한다는 것부터 자체가 '관치의 시작'이라는 게 금융권의 관측이었습니다.
연임이 우세했던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최종 면접 이후 돌연 '연임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조 회장은 "세대교체를 위해 용퇴하기로 했다"면서도 "라임사태의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조 회장은 라임사태와 관련해 금융당국으로부터 징계를 받았습니다. 다만 경징계였죠. 연임은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계를 받았고 이에 대한 책임으로 연임을 포기한다는 발언을 내놓자 금융권은 '당국의 입김'이 닿았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중징계를 받은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을 대상으로는 더욱 날 선 금융당국의 압박이 이어졌습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손 회장이 징계를 받아들일지 말지에 대한 법적 논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불편한다"라며 강도 높게 꼬집었습니다.
이후 고심하던 손태승 회장 역시 연임에 도전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손태승 회장이 내건 이유 역시 '세대교체' 였습니다. 하지만 연임을 위해서는 징계에 불복하는 소송이 불가피한데 금융당국의 압박이 너무 거세다 보니 우리금융지주 회장 직함을 달고 소송에 나서기는 어려웠다는 관측입니다.
당장 소송에 나서는 것에 대해 불편한 낌새를 내비쳤던 금융당국 수장들은 손 회장이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고도 소송에 나설 수 있다는 얘기가 들리자 "개인의 의사 표명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고 말했습니다.
이전의 뉘앙스와는 달랐습니다. 자연스럽게 "원하는 바를 이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라는 평가가 나왔고 관치 논란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결국 올해 금융권 최고 경영자 인사는 '관치금융 부활'이란 평가로 마무리 됐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결과가 누군가의 의지대로 된 것이냐에 대해서는 뒷말이 적잖습니다. 집권 여당과 금융당국 그리고 금융지주 이사회 등이 제대로 된 신호를 주고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정부와 금융당국의 강한 힘을 통해 민간 금융회사에 영향력을 발휘했음은 분명한데 원하는 바를 정확히 얻어내지는 못했다는 게 이유입니다.
일단 '합'이 맞았다고 평가받는 곳은 농협금융지주 회장 인선입니다. 농협금융지주는 올해부터 이석준 회장이 이끌고 있습니다. 이석준 회장은 행정고시 26회로 공직에 입문한 뒤 금융위원회 상임위원, 기재부 예산실 실장, 기재부 2차관, 국무조정실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특히 이 회장은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인재 영입 1호로 캠프에 합류했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특별고문으로 활동했습니다. 선거철 '요직'을 맡은 인사에게 한 자리 내어준 전형적인 관치금융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그런데 BNK금융지주와 우리금융지주 회장 인선에서는 '합'이 잘 맞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BNK금융지주는 내부 출신인 빈대인 전 부산은행장을 차기 회장으로 내정했습니다. BNK금융지주에 정치권이나 관에 줄이 닿은 인사가 회장 자리에 오를 것이란 평가가 많았는데 예상을 깨고 빈 전 행장이 추천된 겁니다.
금융권 한 고위 관계자는 "애초에 롱리스트를 꾸릴때 까지만 하더라도 유력한 인사는 외부출신 인사였다"며 "관치 입김이 너무 거세다는 여론에 일자 방향을 돌린 것으로 안다"고 전합니다. 그는 "이 과정에서 회장 후보를 추천한 인사들과의 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금융 인사철의 '핵'이었던 우리금융지주는 차기 회장에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을 내정했는데요. 마지막까지 그 과정을 뜯어보면 '외풍'의 진원이 여러 곳인가 싶은 분위기가 엿보입니다.
우리금융지주가 차기 회장 후보군(롱 리스트)을 발표하자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차기 회장 후보군을 선출하는 것이 일주일 만에 결정이 나는 것이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다"라며 "선진금융기관을 보유한 나라의 경우 이사회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회장의 유고도 고려한다"라고 했죠.
김주현 금융위원장도 지난달 30일 업무보고 브리핑에서 "지금의 시스템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투명한 절차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며 우리금융 임추위에게 경고를 보냈습니다.
종전 의도대로 손태승 회장은 연임을 포기했죠. 하지만 그 이후 발표된 후보군이 적절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혔습니다. 후보군에 원하는 인사가 들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파다했습니다. 임 내정자가 정권 핵심부의 의중에는 벗어난 인물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 속에는 검찰 출신 인사들과 기획재정부 등 재무 관료 출신 인사들의 보이지 않는 알력다툼이 있었다는 후문입니다.
금융권 한 고위 관계자는 "임 후보는 기재부 출신들이 추천한 인사였지만 검찰 출신 인사들이 민 인사는 따로 있었다"며 "조율이 되지 않아 (금감원장의) 쓴소리가 나온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여러 외풍 속에 '미스매치'가 있었다는 겁니다.
어찌 됐건 금융권 인사 이슈는 일단락됐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금융회사는 공공재나 다름없다"며 관치 논란을 불 끄려 했는데요. 교체된 새 세대 금융권 CEO들은 어떤 경영행보를 보여줄지, 또 어디서 어떤 입김이 불지 지켜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