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가의 길을 걸은 지도 어느덧 38년째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는 없다. 그에 따른 변화도 불가피하다. 매출 4조원에 육박하는 중견기업 반열에 오르게 한 주역이지만 지금은 경영 실권자(實權者)에 가려 존재감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가업승계도 매한가지일 게다.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고 사람도 변하는 게 세월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경영자로 첫 발을 내디뎠던 개인회사에 일찌감치 2세들을 올려놓은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그림일 수 있다. 국내 1위 의약품 유통·물류 업체 지오영그룹의 공동창업자 이희구(72) 명예회장 얘기다.
지오영 800억 수익화의 대가 지배력 약화
2002년 5월, 의약품 유통 지주회사 ㈜지오영을 창업한 초기만 해도 이 명예회장은 단일주주로는 최대주주였다. 지분 31.3%를 소유했다. 다음으로 조선혜(67) 현 회장이 29.3%, SK네트웍스(당시 SK글로벌)가 22.9%로 뒤를 이었다.
2년 뒤 SK네트웍스 등의 지분 인수를 통해 양대 창업자가 각각 45.0%, 44.9%의 지분을 소유하게 됐을 때도 이 명예회장은 1대주주 지위를 놓지 않았다. ㈜지오영 등의 감사보고서상의 자금흐름으로 추산해보면 투자자금은 대략 70억원가량이다.
[승계본색] 지오영 ②편에서 언급한대로, 이후 공동창업자의 행보는 달랐다. 이 명예회장은 상대적으로 투자회수에 무게를 뒀다. 2009년 세계적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를 시작으로 3차례에 걸친 외부자금 유치 중 2013년 홍콩계 사모투자펀드(PEF) 앵커에쿼티파트너스(앵커PE)를 새로운 재무적투자자(FI)로 맞아들인 게 첫 계기였다.
당시 앵커PE는 ㈜지오영에 1550억원을 투자했다. 기존 주주들의 지분 46%를 950억원에 사들였다. 전환사채(CB) 600억원도 인수했다. ㈜지오영 지분을 내놓은 주주 중 한 명이 이 명예회장이었다. 지분이 24.59%→12.29%로 절반으로 축소됐던 이유다. 대가로 250억원가량을 손에 쥐었다.
공교롭게도 이 명예회장은 이듬해 6월 조 회장과 함께 앉아있던 ㈜지오영의 공동대표이사 자리에서 내려왔다. 지금은 사내 등기임원직만 가지고 있다.
2019년 5월 FI가 글로벌 사모투자펀드(PEF) 블랙스톤(SHC Golden)으로 교체될 때도 또 한 차례 현금화가 이뤄졌다. 당시 이 명예회장은 ㈜지오영의 지분 8.73%를 보유했는데, 이를 950억원에 조선혜지와이홀딩스에 매각한 뒤 대략 400억원의 자금만 지주회사에 유상증자를 통해 재투자했다.
현재 이 명예회장의 홀딩스 지분은 6.76%다. 조 회장(21.99%)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결국 지오영그룹에서 이 명예회장의 존재감이 현 ㈜지오영 단독대표인 조 회장의 그림자에 가려 보이는 것은 ㈜지오영 상당지분을 800억원가량 수익화 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벌이 쏠쏠…2세 등장 낯설지 않은 이유
반면 이 명예회장이 현재 지오영그룹 계열․관계사 중 유일하게 대표이사로서 직접 경영을 챙기고 있는 곳이 있다. 대웅제약으로 옮겨 영업본부장 등을 지낸 뒤 독립, 1983년 1월 경영자로서 첫 활동무대로 삼았던 인천 소재 의약품 도매 유통업체 동부약품이다.
원래의 동부약품은 2006년 2월 청산된 뒤 7개월 뒤 다시 설립되는 과정을 거치는 데, 주주들의 면면을 보면 이 명예회장은 2010년 지분 30%를 인수, 단일 1대주주가 됐다. 재설립 뒤 대표 자리에 앉은 것도 이 무렵이다.
흥미로운 것은 다음이다. 부인 주선순(71)씨 사이의 장남 이승우(45)씨와 장녀 이화정(47)씨가 각각 25%, 20% 도합 45%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이 명예회장 2세들이 동부약품 주주명부에 이름을 올려놓은 시점도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범위로만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이 명예회장이 벌이가 비교적 쏠쏠한 동부약품을 가족 소유로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부약품은 2013년과 2020년 각각 5억원 도합 10억원의 배당금을 주주들에게 쥐어주기도 했다.
동부약품은 총자산 381억원(2020년 말)으로 2016~2020년 매출이 적게는 219억원, 많게는 335억원이다. 특히 영업이익은 설립이래 단 한 해도 흑자를 놓친 적이 없다. 최근 5년간 한 해 평균 10억원가량을 벌어들였다. 이 명예회장 2세들의 등장이 낯설지 않아 보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