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부터 2인자를 지칭하는 수식어는 다양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 복심(腹心), 장자방(張子房), 오른팔 등 용어는 다르지만 의미는 하나다. 재계에도 2인자로 꼽히는 수많은 부회장들이 존재한다. 직장인들의 꿈인 대기업 임원,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재계 부회장, 그들이 누구인지 들여다 봤다. [편집자]
한국 산업이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중 하나로 오너중심의 의사결정 체제를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그룹 총수들의 빠르고, 과감한 의사결정은 후발주자로 출발한 한국을 세계 9위권의 무역강국까지 올려놓는데 일조했다.
그리고 그룹 총수들의 주변에는 항상 이를 보좌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이른바 2인자들이다. 창업-승계로 이어져온 국내 대기업에서 샐러리맨으로 시작해 최정점까지 도달한 사람들이다.
◇ 삼성, 이학수-김순택-최지성
재계를 거쳐간 2인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삼성그룹의 이학수 전 부회장이다. 이 전 부회장은 제일모직으로 입사한 후 80년대초 그룹 재무팀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후 90년대 초중반 삼성화재에서 근무하며 대표이사를 역임한 뒤 90년대 중반 그룹 회장 비서실에서 2인자로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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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본부장, 회장실 실장, 전략기획실 실장 등 호칭은 변했지만 이건희 회장의 분신처럼 움직인다. 이학수 전 부회장은 삼성전자를 맡았던 윤종용 전 부회장과 함께 삼성의 성장을 같이 했다.
하지만 삼성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물러나면서 그 자리는 김순택 전 부회장에게 넘어간다. 김순택 전 부회장 역시 회장 비서실에서 근무하며 이건희 회장을 보좌한 경력이 있다. 김순택 전 부회장이 그룹을 총괄할 당시 최지성 부회장은 삼성전자 대표이사를 맡고 있었다.
하지만 김순택 전 부회장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2012년 6월 최지성 부회장이 미래전략실을 맡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성 안팎에서는 최지성 부회장이 당분간 2인자의 자리를 유지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 현대차, 롱런은 없다
삼성의 2인자가 비교적 오랜 기간 그룹 총수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면 현대차그룹은 좀 다르다. 현대차그룹은 특정인사에게 권한이 집중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는 정몽구 회장 특유의 인사 스타일과도 맞물린다. 정 회장은 경영일선에 물러나 있던 인물이라도 수시로 필요한 인사를 등용해 왔다. 그룹 내부에서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말이 회자되는 이유다.
현재 현대차그룹에는 오너일가인 정의선 부회장을 포함, 11명의 부회장이 있다. 이중 기획담당인 김용환 부회장이 2인자에 근접해 있다는 평가다. 지난 2012년초 재무담당인 이정대 부회장이 현대모비스로 발령난 후 사실상 그룹내 참모그룹의 힘이 김용환 부회장에게 쏠렸다는 관측이다.
다만 정몽구 회장이 여전히 경영전면에 나서 있는 만큼 김 부회장의 역할은 제한적이라는 것이 현대차의 입장이다.
◇ SK의 손길승, LG의 강유식
SK그룹의 2인자로는 손길승 전 회장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선대회장부터 경영에 참여해 왔고, 최태원 회장으로의 경영승계 과정에서 손 전 회장은 조력자 역할을 했다.
2000년대 초반 SK그룹이 위기에 빠졌을때도 2인자 그룹의 역할은 작지 않았다. 이후 경영승계가 마무리되고, 최태원 회장이 경영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2인자 그룹의 역할은 축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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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근 최 회장의 공백이 다시 생기면서 김창근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 다시 2인자의 역할을 하는 분위기다. 김창근 의장은 산하 6개 위원회 위원장들과 함께 SK그룹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다.
LG그룹에서는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강유식 부회장이 꼽힌다. 외환위기 시절부터 구본무 회장을 보좌해 왔다. 강 부회장은 외환위기 시절 반도체 빅딜, 이후 LG카드 사태, LG와 GS의 분가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을 잡음없이 해결했다.
LG그룹 2인자는 지주회사라는 특성상 각 계열사의 사업보다 그룹 전체의 안건을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과거 구조조정본부에서 지금의 미래전략실까지 계열사 전체를 움직이는 삼성의 2인자와는 역할에서 차이가 있다는 평가다. LG에서는 현재 조준호 사장이 과거 강유식 부회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빗나간 2인자
2인자라는 자리는 오너를 보좌해 기업의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추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때문에 어떤 인물이 2인자를 맡느냐에 따라 기업의 흥망이 결정되기도 한다.
재계에서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사례가 대한전선이다. 설원량 회장이 갑작스럽게 타계한 직후 대한전선의 경영을 맡은 인물은 임종욱 전 부회장이다. 임 부회장은 설원량 회장의 비서로 오너 일가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임 전 부회장의 기용은 결과적으로 대한전선의 몰락을 가져온다. 본업인 전선사업 외에 부동산, 해외지분투자 등으로 관심을 돌린 결과는 참혹했다. 임 전 부회장은 개인적인 비리혐의로 재판이 진행중이고, 대한전선은 몇년째 이자마저 감당하기 어려운 식물 상태가 됐다.
결국 설 전 회장의 아들인 설윤석 사장은 회사를 살려야 한다며 지난해 10월 경영권을 포기했다. 전문경영인의 잘못된 기용이 3대를 이어온 기업의 명운을 결정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