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이 다시 핫해지고 있습니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원자로 개발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야당과 언론 등에서 정부의 탈원전 기조에 변화가 생긴 것 아니냐는 의심도 나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닙니다.
탈원전 정책은 계속 유지합니다. 하지만 원전은 개발합니다. 말장난 같지만 사실입니다. 새로 개발하는 원전은 국내에 지으려는 게 아니라 세계 시장에 팔기 위한 것입니다. 게다가 원전시장 개척은 혼자가 아닙니다. 파트너는 바로 미국입니다.
한미 정상 "해외원전사업 공동참여"
문재인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 일정을 마무리 하고 귀국했습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첫 정상회담입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이후 꾸준히 탈원전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직후 첫 행보가 미국의 파리기후변화협약 복귀 서명이었죠.
환경보호에 앞장서고 있는 두 대통령이 만나 발표한 내용은 놀랄만합니다. 바로 원전수출입니다. 양국 정상은 회담 이후 공동성명을 내고 "원전사업 공동참여를 포함해 해외원전시장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최고 수준 원자력 안전·안보·비확산 기준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한국과 미국이 원전을 제3국에 수출할 때 상대국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추가 의정서에 가입해야만 원전을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IAEA 추가 의정서는 핵에 대한 정보개방을 강화하겠다는 약속입니다. IAEA 사무국과 사찰관에게 원자력 관련 시설에 대한 정보 접근을 허용해 무기화를 방지합니다.
결국 원전 수출을 통해 두 마리 토끼를 잡자는 얘기입니다. 수출을 통해 수익을 거두면서 규제도 강화해 핵무기 확산은 막는 것이죠.
그런데 양국의 협력 소식이 다소 의아하게도 보입니다. 한국은 탈원전을 하겠다는 나라고 미국도 기후변화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양국이 함께 원전을 수출하겠다는 얘기는 어불성설이 아닐까요?
결론부터 얘기하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땅에 원전을 새로 짓지 않겠다고 했을 뿐 수출까지 못 할 이유는 없습니다. 미국은 아예 탈원전을 시도한 바도 없습니다. 파리기후변화협약의 이행을 위해서는 온실가스 배출이 없는 원전을 확대하는 것 또한 합리적이라는 시각이 많습니다.
정치권, 소형원자로 연구개발 필요성 강조
그동안 정부가 탈원전과 원전 개발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에 대한 혼란은 꾸준하게 있었습니다. 특히 정치권을 중심으로 원전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면서 논란이 컸습니다.
최근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문 대통령을 만나 소형모듈원자로(SMR)의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문제는 이번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야당과 일부 언론에서는 '여당 대표가 대통령이 고집하는 탈원전 정책을 치받았다'는 해석을 앞다퉈 내놓았습니다. 나아가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이보다 앞서 지난 4월 국회에서는 '혁신형 SMR 국회포럼'이 출범했습니다. 포럼은 국회 과학기술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인 더불어민주당 이원욱 의원과 국민의힘 김영식 의원이 공동위원장을 맡았습니다. 11명의 여야 국회의원과 원자력산업계, 학계, 연구계 및 정부 유관부처 주요 인사가 참여했습니다. 이 포럼 역시 정부의 탈원전 기조와 반한다는 언론보도가 쏟아졌습니다.
정부와 정치권이 엇박자를 내고 있는 게 사실일까요.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굳건합니다. 지난 18일 산업통상자원부는 탈원전 기조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보도에 반박하는 설명자료도 냈습니다. '국내에 신규 원전을 건설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에너지전환 정책은 변함이 없다'는 게 요지입니다.
탈원전 정책 유지…수출용 SMR 개발 계속
그렇다면 최근 논의되는 원전에 대한 이야기는 뭘까요.
바로 수출용입니다. 우리 땅에는 원전을 건설하지 않더라도 아직 해외에서는 원전에 대한 수요가 많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소형모듈형원자로의 연구개발에 힘을 쏟자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14일 문 대통령을 만난 송 대표는 "미국 바이든 정부가 탄소 중립화를 위해 SMR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다"며 "SMR 분야나 대통령이 관심을 갖고 있는 원전 폐기 시장 같은 것도 한미가 전략적으로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송 대표의 발언은 국내에 원전을 더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원전, 그중에서도 SMR에 대한 연구개발을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정부도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원전 자체에 대한 연구과 기술개발은 계속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켜왔습니다. 탈원전과 탄소중립 정책이 정책으로 채택된 지난 2017년 '에너지 전환 로드맵'에도 탈원전의 대안으로 원전 수출 지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난해 12월 개최한 국무총리 주재 제9차 원자력진흥위원회에서 SMR 개발을 공식화했죠. 우리는 탈원전을 하면서 해외에는 원전을 수출하자는 얘기다보니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 기조가 바뀐 적은 없습니다.
4000억원 투자 결정…원전·투자업계는 이미 반응
정리하자면 우리는 원전을 더 건설하지는 않을 계획입니다. 하지만 해외 원전시장에서는 아직 실적을 올리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SMR이 있습니다. 원전에 대한 트렌드가 기존 대형 원전에서 SMR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SMR은 기존 원자로의 '미니'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원자로의 용량과 크기를 줄이면 사고에 대한 대비가 쉬워지고 계통연결의 어려움도 개선됩니다. SMR의 특징에 대해서는 에너지워치에서 앞서 다룬 바 있습니다. ▷관련기사: [에너지워치]원전은 죽지 않는다, 다만 작아질 뿐(4월22일자)
이미 원전 관련 업계는 움직이고 있습니다. 최근 한전기술은 한수원으로부터 혁신형 SMR 계통 및 종합설계용역과 관련해 약 220억원 규모의 프로젝트를 수주했습니다.
이번 투자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지난해 말 원자력진흥위원회는 혁신형 SMR과 관련해 향후 8년 동안 4000억원의 자금집행 계획을 확정했기 때문입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연내 경수로형 기반 한국형 SMR 완제품 개발을 위해 예비타당성 조사를 추진한다고 최근 밝혔습니다. SMR 분야에서 가장 앞서 있다는 미국 뉴스케일 파워(NuScale Power)가 2029년 가동 목표인데 우리는 2028년까지 개발을 완료하겠다는 게 목표입니다.
투자자들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 한전기술의 주가는 연초대비 두배 이상 올랐습니다. 특히 4월 국회 포럼 이후 급등했습니다. 비에이치아이와 보성파워텍 같은 전통적인 원전 테마주들도 동반상승하는 분위기입니다.
SMR 우리가 원조…"따라잡을 만 하다"
일각에서는 탈원전을 할 거면 원전에 대한 기술개발도 접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우리의 기술력이 아깝다는 게 원전업계의 설명입니다.
OECD 원자력기구(NEA)에 따르면 2035년까지 세계 각국의 신규 원전 수요 중 9%가 SMR로 이뤄질 전망입니다. 관련 시장 규모는 400조원대로 예상됩니다.
이미 전 세계에서 71종 이상의 SMR이 개발 중입니다. 미국과 러시아가 각각 17기의 SMR을 개발하고 있고 중국 8기, 일본 7기 등 인근 국가도 개발에 한창입니다. 우리는 한수원과 두산중공업 등을 통해 2기의 SMR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2기. 늦었을까요. 한국은 원전에 대해 최고 수준의 인력과 기술력을 보유한 나라입니다. 사실 우리는 SMR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국가입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이 1997년부터 스마트(SMART·System-integrated Modular Advanced-ReacTor)라는 SMR 모델을 개발했습니다. 2012년 세계 최초로 표준설계인가도 받았죠. 한수원은 스마트를 개량한 혁신형 SMR도 개발하고 있습니다. 후쿠시마 사태가 아니었다면 이미 상용화를 해냈을 거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원전 수출에 협력하기로 한 미국 또한 우리의 뒷배입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SMR 분야의 협력을 같이 할수 있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습니다. 러시아와 유럽은 경쟁국가입니다. 중국과 손을 잡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일본은 후쿠시마가 발목을 잡습니다.
한 원전업계 관계자는 "따라잡을 여력은 충분하다"며 "탈원전 기조에서 생존을 위해서라도 SMR 연구 개발에 역량을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