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확산으로 국내 진단키트 업체들의 저력이 빛나기 시작했다. 발 빠르게 진단키트를 개발해 기술력을 인정받고 글로벌 시장을 선점했다. 씨젠은 'K-진단키트'의 위상을 보여준 대표 주자다. 국내에서 코로나19가 발생한 지 2주만에 코로나19 진단키트 개발에 성공했다. 코로나19 진단키트를 해외 65개국 이상에 수출하며 세계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10여 년간 진단키트에 올인…매출 '1조' 돌파
그동안 제약바이오업계에서 진단키트 분야는 신약 개발 분야에 비해 성장성이 낮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파이프라인을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하기 어렵고 해외 진출이 쉽지 않은 탓이다. 신약 개발 성공만큼의 주가 상승 추진력도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씨젠은 2000년 설립 이후 10여 년간 분자진단 기술 개발에 힘을 쏟았다. 유전자를 분석해 인유두종 바이러스, 헤르페스 바이러스 등 바이러스 감염 여부를 확인하는 분자진단 기술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자체 개발한 소프트웨어 기술을 통해 검사 결과의 편차를 없앤 분자진단 표준화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인사이드 스토리]주춤했던 ‘씨젠’, 반전 드라마 쓸까(4월14일)
이런 씨젠의 뚝심은 최근 들어 결실을 맺고 있다. 지난해 코로나19 확산 이후 씨젠은 다른 바이러스 분자진단 사업을 전면 중단하고 코로나19 진단키트에만 집중했다. 그 결과 진단키트 분야의 성장성을 '성과'로 증명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씨젠은 지난해 매출액 1조원을 돌파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최근 3년간 매출액을 보면 2018년 1023억원, 2019년 1220억원에서 지난해 1조1252억원으로 가파르게 증가했다. 1년 만에 매출액이 10배 넘게 오른 셈이다.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 역시 크게 늘었다. 지난해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은 각각 6762억원, 5031억원으로 전년 대비 2916%, 1784% 증가했다. 분기별 매출액으로 보면 지난해 1분기 매출액 818억원에서 올해 1분기 3518억원으로 전년 대비 330% 증가했다.
영업이익률은 지난해 3분기 64%를 기록했다. 60%를 넘는 이익률은 게임업계 등 IT 기업에서나 볼 수 있는 수치다. 올해 1분기 영업이익률은 55%로 줄었지만 대규모 연구개발(R&D) 투자, 생산시설 확충, 핵심인력 채용 등 투자 비용이 증가한 걸 감안하면 선방했다는 평가다.
코로나19 수혜, '일회성'에 그칠까
업계 일각에서는 씨젠의 급성장을 우려하기도 한다. 코로나19 사태 종식 후 진단키트 수요가 줄어들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씨젠의 코로나19 관련 매출은 전체 매출의 80%에 달한다.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매출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4분기 3019억원 규모였던 코로나19 관련 매출이 올해 1분기에는 2243억원으로 줄었다. 이 때문에 씨젠의 성장이 '일회성'일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씨젠 측은 이런 우려가 '기우'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이런 자신감의 기반에는 탄탄한 기술력이 있다. 그중에서도 진단장비는 분자진단키트와 함께 씨젠 매출을 견인한 대표 제품으로 꼽힌다. 진단장비는 씨젠이 보유한 진단키트를 사용하고 분석하는 데 필요한 기계다. 씨젠은 현재 글로벌 체외진단기기 업체 '바이오래드'가 공급하는 유전자 증폭(PCR) 장비 'CFX96'에 씨젠의 전용 기술을 탑재해 재판매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씨젠의 진단키트와 진단장비의 호환성이 높다는 점이다. 씨젠의 진단키트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씨젠의 진단장비를 사용해야만 한다. 지난해 진단키트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진단장비의 수요도 함께 증가했다. 지난해 씨젠은 글로벌 시장에 진단장비 약 1600대를 판매했다. 2010년 진단장비 판매를 시작한 이후 지난 2019년까지 누적 판매량은 약 1900대 정도다. 작년 한해 진단장비 판매량이 전체 진단장비 판매량과 맞먹는 셈이다. 지난해 진단장비 매출액만 1747억원에 달한다.
진단키트 사용을 위해서 진단장비를 구입한 만큼 일회성 고객 비중은 작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진단장비 판매가 증가하면 씨젠의 다른 진단키트의 판로도 넓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진단장비를 구매한 의료기관들은 코로나19 진단키트 외에도 자궁경부암, 성매개감염증 등 씨젠의 다른 진단키트를 구매할 수 있다. 선민정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다른 진단 기업과 다른 씨젠의 경쟁력은 장비와 연동된 진단키트라는 점에서 록인(Lock-in)효과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이후 목표, '분자진단의 생활화'
코로나19 이후 씨젠의 행보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업계에서는 씨젠이 코로나19 진단키트 등의 매출로 확보한 현금을 통해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씨젠의 현금성 자산은 3081억원 정도다. 전년 491억원과 비교해 6배 넘게 증가했다.
씨젠은 지난해 이후 인공지능(AI), 인수·합병(M&A), IT 연구 등 여러 분야의 외부 전문가들을 영입하고 있다. 올해 2월에는 M&A 총괄 부사장으로 박성우 전 대림그룹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영입했다. 사업다각화를 위해 M&A에 투자하는 제약바이오 기업이 늘고 있는 만큼 씨젠도 새로운 사업에 진출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R&D 등 신규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김승회 DS투자증권 연구원은 "오는 2022년 말 기준 1조원에 달하는 현금을 내부 유보하는 것보다 신규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투자에 나서는 것이 장기적인 주가 방향성에 긍정적일 것"이라며 "투자 확대에 따른 비용 증가를 걱정하기보다는 중장기 사업 비전과 신성장 동력 확보에 집중할 시점"이라고 밝혔다.
씨젠의 최종 목표는 '분자진단 생활화'다. 일상 속에서 누구든지 특정 증상이 생기면 분자진단을 이용해 질병을 진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씨젠이 그리는 큰 그림이다. 씨젠의 분자진단 기술은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은 물론 결핵, 자궁경부암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할 수 있다. 나아가 식품 검사, 동·식물 검사 등의 질환 이외의 분야로도 분자진단 영역을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코로나19를 발판 삼아 씨젠이 분자진단의 대중화를 이끌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