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민경 기자]SK이노베이션이 국내 최초로 정유·석유화학 공정에 인공지능(AI) 및 디지털전환(DT) 기술을 적용한 솔루션을 개발했다. 60여년간 쌓아온 플랜트 운영 노하우를 활용, 최근엔 지역 AI 기업과 손잡고 새로운 시스템도 개발 중이다. SK이노베이션은 이러한 AI·DT 솔루션을 새로운 미래 먹거리로 삼아 해외 진출을 노린다는 복안이다. 여기엔 1964년 국내 최초 정유공장으로 시작한 SK 울산콤플렉스(CLX)가 중심에 있다.
수십만개 설비가 한눈에
지난 24일 방문한 울산 CLX. 올해로 환갑을 맞았다. 입구에 들어서자 거대한 부지가 위엄을 뽐냈다. 면적은 약 826만㎡(250만평). 여의도 3배 면적에 달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석유화학 공장이다.
여기에 설치된 수만개의 송유관도 장관을 이뤘다. 구불구불하게 엮인 송유관엔 세월의 흔적이 녹으로 남았다. 마치 모세혈관처럼 이어진 이곳 송유관 길이는 무려 60만km다. 지구에서 달까지 가고도 남는다.
공장은 60만기 공정설비가 맞물려 가동되고 있다. 이를 통해 매일 84만 배럴의 원유를 정제한다. 국내 하루 소비량의 40%에 달하는 양이다.
넓은 부지와 수많은 설비보다 중요한 건 안전이다. 석유화학 공장인 만큼 작은 사고가 대형 화재로 번질 수 있다. 하지만 설비 관련 데이터 양이 방대한 데다 복잡해 이를 한눈에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이에 SK이노베이션은 차세대 설비관리 시스템 '오션허브(Optimized & Connected Enterprise Asset Network-Hub)'를 도입했다. 일종의 '설비 게놈(Genome) 프로젝트'다. 인간의 체질·유전자 정보·가족력 등 분석을 통해 질병을 사전 예방하는 것처럼 정확한 설비 데이터로 고장을 예측하는 것이다.
오션허브는 각 설비에서 측정되는 온도, 압력 등 데이터를 수집 및 분석해 공장 관리를 돕는다. 현장 배관을 포함한 전체 공정설비와 건물 등 디지털 통합 관리가 가능하다.
AI 의사가 실시간 건강검진
최근 들어선 세계 최초 'AI 비파괴검사 자동 평가 솔루션'을 개발해냈다. SK이노베이션과 지역 AI기업 '딥아이(DEEP AI)'와 협력한 결과다.
1년 365일 가동되는 정유·석유화학 공정은 안전 운전을 위해 주기적으로 검사를 진행하고 엔지니어가 정비 여부를 판단한다. 대표적인 방법이 초음파를 이용해 결함을 찾는 '비파괴검사'다. 주로 '열교환기' 결함 검사에 사용된다.
열교환기는 제품 생산 시 온도 조절에 쓰이는 핵심 부품이다. 울산 CLX에만 약 7000기가 설치돼있고, 울산 석유화학산업단지 내엔 약 3만기가 있다.
열교환기는 증류탑 내 온도를 높이고, 내리는 기능을 한다. 정유 제품은 끓는 점에 따라 종류가 나뉜다. 대략 350~360도 수준으로 가열, 이후 성분의 끓는점 차이를 통해 △LPG △나프타 △휘발유 △등유 △경유 △중유 △아스팔트 등으로 분리한다.
때문에 열교환기는 수천여개 튜브로 구성돼있다. 튜브 면적이 넓을수록 열교환이 빠르고 효과적이라는 게 전문가 설명이다.
문제는 열교환기 특성상 고장이 잦다는 점이다. 설비 노후화 및 혹독한 운전환경으로 균열·부식·마모가 일어난다. 특히 고장 원인의 약 80% 이상이 열교환기 내 튜브 손상이다. 열교환기가 손상된 채로 운전되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이에 기존엔 주기적으로 검사를 진행, 안전사고를 예방해왔다. 초음파를 이용해 튜브를 촬영한 후 전문가가 육안으로 결함을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다만 전문가 경험과 역량에 의존됐기에 정확도나 소요시간 등에서 한계가 있었다. 관련 분야 전문가가 감소하고 있는 점도 골치였다.
하지만 이번에 SK이노베이션이 선보인 'AI 비파괴검사 기술'은 차이가 명확하다. 해당 기술은 초음파로 튜브를 촬영, 이후 검사를 AI가 진행한다는 게 핵심이다. 축적된 데이터를 활용해 AI가 결함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정확도는 95% 이상이다. 기존 대비 검사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도 각각 90%, 50% 이상씩 줄었다.
지금은 열교환기 내 튜브에만 사용하지만, 향후 배관과 기타 부품 검사 등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란 설명이다.
울산 단지 넘어 해외 시장 잰걸음
SK이노베이션은 솔루션 자체개발에 이어 사업화까지 모색 중이다. 우선 오션허브 사업화는 이미 성과를 내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초 오션허브를 상업화한 후 현재까지 울산 지역 정유·석유화학업체 5개사를 고객으로 확보했다. 이를 통해 약 35억원 매출을 올렸다.
국내 환경에 맞게 구현된 시스템에 다수 기업들의 협업요청이 몰리고 있다. 정유 및 석유화학업계뿐 아니라 발전·철강·배터리 분야 등에서도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실제 오션허브를 도입한 고객사들은 오픈소스 솔루션에 기반, 기존 시스템과 유연한 접목이 가능할 뿐 아니라 대기업-중견중소기업 간 데이터를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호평하고 있다.
이철영 이수스페셜티케미칼 검사팀장은 "설비 시스템 운영 솔루션 프로그램을 찾던 중 SK의 오션허브가 단연 눈에 띄었다"며 "당사는 화학기업 특성상 다양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와 연결해 사용 가능한 소프트웨어가 필요했었고, 비교군에 있던 해외 프로그램들은 지향점이 너무 뚜렷해 연동하기가 어려웠던 반면 오션허브는 가능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 팀장은 "대기업과 중견기업 간 상생할 수 있는 데이터를 공유함으로써 데이터 관련 신뢰도 또한 높아졌다"고 덧붙였다.
SK이노베이션은 오션허브를 지속 지능화·고도화할 방침이다. AI 기술을 접목해 편의성 및 정확도를 개선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향후 해외 시장 공략에도 나설 계획이다. 지난 2023년 11월에는 인도 글로벌 IT 서비스·소프트웨어 기업인 TATA그룹의 TCS(TATA Consultancy Service)와 업무 협약을 체결한 데 이어, 인도네시아·태국·베트남·인도 등 글로벌 시장에 진출한다는 포부다.
아울러 AI 비파괴검사는 울산 CLX 현장 실증을 거친 후 전면 적용, 향후 울산 정유·석유화학 단지로 확대할 방침이다.
SK 울산 CLX 관계자는 "AI 비파괴검사 자동평가 솔루션을 고도화해 국내 전체 정유·석유화학산업 뿐 아니라 동일기술이 적용되는 배관·보일러·탱크·자동차·항공기 부품 분야까지 시장을 확대할 계획"이라며 "더불어 해외시장 진출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한편, 울산 CLX는 DT 프로젝트인 '스마트플랜트 2.0' 추진을 통해 연간 100억원 이상의 비용 개선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지난 2016년부터 추진했던 스마트플랜트에 AI와 DT를 접목, 스마트플랜트 2.0으로 진화·발전된 만큼 가시적인 성과를 적극 만들어 내겠다는 입장이다.
서관희 SK에너지 기술·설비본부장은 "SK 울산 CLX는 정유·석유화학 전문성을 바탕으로 AI 등 다양한 디지털기술을 활용해 경쟁력을 확보해가고 있다"며 "국내 최초 정유공장에 이어 국내 최초 스마트플랜트 도입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만큼 확실한 성과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