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어는 소비자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드라마 PPL도, 유튜브 협찬도 없다. 그런데 유럽 축구장 광고판, 포뮬러 E 차량, 미국 야구 중계 화면에는 낯익은 로고가 반복된다. 'Hankook(한국)'.
전자제품이나 자동차처럼 소비자와 직접 닿는 제품도 아닌데 한국타이어는 지금 세계 어디서나 존재감을 드러내는 브랜드가 됐다. 완성차 메이커의 그늘에 가려지기 쉬운 B2B 기반 산업임에도 브랜드 독립성과 글로벌 전략을 동시에 꾀한 흔치 않은 사례다.
CI부터 시작된 글로벌 브랜드 전환
2004년 한국타이어는 브랜드명을 'Hankook'으로 일원화한 새로운 CI(Corporate Identity)를 꺼내 들었다. 소비자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CI는 기업 정체성을 한눈에 보여주는 가장 직관적인 시각 언어다. CI 교체와 동시에 브랜드를 글로벌 소비자 눈높이에 맞춰 리포지셔닝하는 작업이 병행됐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두 가지 구조적 제약이 있었다. 하나는 타이어가 완성차에 탑재되는 대표적인 부품이라는 점과 글로벌 소비자 대부분이 타이어 브랜드보다 자동차 브랜드에 먼저 주목한다는 인식 구조였다. 한국타이어 입장에서는 완성차 브랜드의 후광 효과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사 브랜드의 독립성을 키워야 할 필요성이 컸다.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기술적 자신감이 있었다. 당시 한국타이어는 고성능 차량에 납품할 수 있는 품질 수준을 확보하고 있었고 유럽·북미 시장에 대응할 수 있는 제품군과 OEM 납품 경험도 꾸준히 축적하고 있었다. 제품이 받쳐준다는 판단 아래 브랜드 중심 전략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 브랜드 전환 작업을 주도한 인물은 당시 마케팅 총괄이던 조현범 현 한국앤컴퍼니 회장이다. 그는 외국 소비자가 제품을 직접 체험하기 어려운 B2B 산업 구조를 고려해 브랜드부터 먼저 익숙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시각적 정체성 강화를 위해 영국의 타이포그래퍼 네빌 브로디와 협업해 새로운 CI 디자인도 완성했다.
'Hankook'이라는 브랜드명은 한국어 발음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간결하고 발음이 쉬워 글로벌 시장에서도 낯설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이후 반복적인 스포츠 마케팅 노출과 기술 기반의 품질 경쟁력이 맞물리며 이 이름은 점차 한국 기술력을 담은 신뢰 브랜드로 인식되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타이어는 제품 특성상 화면에 직접 등장하기 어렵다. 한국타이어는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UEFA 유로파리그, 미국 메이저리그(MLB), 포뮬러 E, 월드랠리챔피언십(WRC) 등 굵직한 글로벌 스포츠 이벤트에 공식 후원사로 참여하며 브랜드 이름을 경기장 광고판과 레이싱 차량 외부에 반복적으로 노출시켰다.
자동차나 가전처럼 제품 자체로 시선을 끄는 소비재와 달리 타이어처럼 간접 접점에 머무는 산업재 품목은 브랜드 인지가 곧 제품 신뢰로 이어지는 구조다. 결국 CI 리뉴얼과 스포츠 마케팅을 축으로 한 이 시기의 브랜드 전략은 한국타이어가 'Hankook'이라는 고유명을 글로벌 브랜드로 정착시키는 기틀이 됐다.
기술이 만든 브랜드, 브랜드가 키운 시장

브랜드 노출 전략은 스포츠 무대에서 현실화됐다. 단순히 광고판에 이름을 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공식 후원사 또는 타이어 공급사로 참여해 브랜드를 경기 환경 안으로 끌어들였다.
포뮬러 E의 경우 2022년까지 공식 타이어 공급사로 참여하며 전기차 레이싱이라는 차세대 기술 무대에서 자사의 기술력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한국타이어는 스포츠 마케팅을 단순한 노출 수단이 아닌 기술 기반 신뢰 축적의 장으로 활용했다.

유럽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축구 경기에서도 한국타이어를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다. 한국타이어는 2012년부터 UEFA 유로파리그의 공식 파트너로 활동 중이다. 세계 최고 권위의 축구 시상식인 '발롱도르'의 공식 후원사로도 참여해왔다. 오는 22일(한국시간 기준) 열리는 유로파리그 결승전, 토트넘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에서도 한국타이어 광고가 내걸릴 예정이다.
한국타이어는 현재 전 세계 180여 개국에 제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지난해 기준 글로벌 타이어 시장 점유율 7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10년 사이 북미·유럽 등 주요 선진 시장에서 판매 비중을 확대했고 전기차용 타이어를 포함한 고부가 제품군 비중도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매출 흐름도 이 같은 방향성에 부합하고 있다. 브랜드 리뉴얼이 이뤄진 2004년 한국타이어의 연간 매출(중국 본부 제외)은 1조8558억원, 영업이익은 2252억원 수준이었다. 이후 2014년에는 매출 6조6808억원, 영업이익 1조316억원으로 증가했고 2024년에는 매출 9조4119억원, 영업이익 1조7622억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