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대법원 무죄 확정 이후 단행한 정기 사장단 인사서 '기술 인재 중용'과 '조직 안정'이라는 두 축을 선명히 드러냈다. 당초 예측됐던 세대교체형 대인사 대신 미래 기술 인재를 핵심 보직에 올리고 기존 투톱 체제를 복원하는 쪽을 택했다. 경영의 연속성과 기술 경쟁력 강화를 동시에 잡겠다는 의도다.
최근 삼성전자는 사장 승진 1명과 위촉 업무 변경 3명 등 총 4명 규모의 2026년 정기 사장단 인사를 발표했다. 지난해 이동 인원이 9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폭은 확연히 축소됐다. 다만 규모가 축소됐음에도 기술 인재 비중은 오히려 높아졌다. 이번에 선임된 4명 가운데 절반이 기술 분야 핵심 인물이다. 사법 리스크 해소 이후 이 회장이 강조해온 '기술 중심 경영' 기조가 한층 선명해졌다는 평가다.
조직 안정 속 '기술 드라이브'
삼성전자는 통상 12월 초 사장단 인사를 발표해 왔지만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시점을 한 주가량 앞당겼다.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조직 안정성과 기술 리더십을 동시에 확보하겠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재계에선 이번 인사를 두고 "안정적 체제를 유지하면서 기술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절충형 인사"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가장 눈길을 끈 건 SAIT 원장에 박홍근 하버드대 교수를 외부 영입한 대목이다. 박 신임 원장은 서울대 전체 수석 졸업, 스탠퍼드 화학 박사, 32세 하버드 조교수 임용, 한국인 최초 하버드 종신교수 등 글로벌 최고 수준 이력을 갖춘 나노 분야 석학이다. 양자컴퓨팅과 뉴로모픽 반도체 등 미래 디바이스 분야의 권위자로, 학계에서는 노벨상 후보군으로도 거론된다. 이 회장이 수차례 강조해온 "선행 기술 확보는 생존 문제"라는 철학이 반영된 인사로 평가된다.
DX부문 기술 컨트롤타워도 교체됐다. 윤장현 삼성벤처투자 대표이사가 사장으로 승진해 DX부문 CTO 겸 삼성리서치장을 맡는다. 그는 무선사업부에서 소프트웨어 플랫폼과 IoT 개발을 이끌었고 최근에는 AI·로봇·바이오 분야 투자까지 주도해 왔다. 삼성전자는 모바일·TV·가전 등 전 제품군에 AI 기반 기술을 확장해 신제품 경쟁력을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반도체와 모바일·가전을 이끄는 양대 사업부문장에 대해서는 '유임' 기조를 택했다. 전영현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장(부회장)은 메모리사업부장을 계속 겸임한다. 그는 지난 1년간 메모리사업을 대표이사 직할 체제로 재편, HBM 사업 정상화와 실적 반등의 기반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메모리 슈퍼사이클을 앞둔 시점이라는 점도 유임 배경으로 꼽힌다. 다만 그간 겸직해 온 SAIT 원장직은 박홍근 사장에게 넘기며 업무 부담을 조정했다.
노태문 디바이스경험(DX)부문장(사장)도 MX사업부장을 그대로 맡는다. 고(故) 한종희 부회장의 갑작스러운 별세 이후 8개월간 DX부문장 직무대행을 맡아 조직 안정화를 이끌었다는 평가다. 정식 부문장에 오른 만큼 모바일·가전·TV를 아우르는 DX부문의 통합 전략, 특히 '갤럭시 경험' 중심 생태계 강화에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조용하지만 큰 변화
'삼성 2인자'로 불렸던 정현호 부회장의 용퇴와 사업지원TF의 사업지원실 전환은 이번 인사 폭이 축소된 또 다른 배경으로 꼽힌다. 이미 그룹 컨트롤타워를 대대적으로 재정비한 상황서 주요 사업부장까지 교체할 경우, 오히려 조직 불안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삼성은 8년간 임시 조직으로 운영해온 사업지원TF를 상설 조직인 '사업지원실'로 격상하고 정 부회장을 회장 보좌역으로 이동시켰다. 미래전략실 해체 이후 흩어져 있던 경영진단·전략·피플 기능을 하나로 묶어 전자 계열의 핵심 기능을 삼성전자 중심으로 재정렬한 조치였다. 재계에선 "사법 리스크가 제거된 시점에 그룹 의사결정 구조를 정상화한 것"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새 사업지원실은 박학규 사장이 이끈다. 미래전략실 경영진단팀장과 DS·DX 부문 CFO를 거친 박 사장은 재무·전략통으로, 약 80명 규모 조직을 총괄하며 전자 계열 전반의 조정 기능을 맡는다. 삼성전자는 "미전실 부활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지만, 재계에서는 "비공식 TF 체제에서 공식 기구로의 복귀"라는 해석도 나온다. 이 회장의 사법 리스크 해소 이후 첫 번째 정상화 조치라는 상징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삼성의 경영 조정 조직은 이병철 선대 회장 시절 비서실에서 출발해 구조조정본부, 전략기획실, 미래전략실로 이어지며 총수 직속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해왔다. 2017년 국정농단 사태 이후 미전실이 해체되자 삼성은 사업지원TF, EPC경쟁력강화TF, 금융경쟁력TF 등 분야별 TF 형태로 조율 기능을 분산했다. 정 부회장이 이끌던 사업지원TF가 8년간 유지된 배경이다.
이 회장이 올해 180여차례 법정 출석 끝에 대법원 무죄 판결을 받으며 경영 정상화의 명분과 동력을 확보한 점도 사업지원실 출범의 기반이 됐다. 무죄 확정 이후 이 회장은 글로벌 현장에서 광폭 행보를 이어왔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의 회동에서 HBM4 공급을 확정했고 테슬라와는 23조원 규모의 AI 반도체 칩 계약을 성사시켰다. 오픈AI와는 월 90만장 규모의 HBM 공급의향서를 교환했다. 사업지원실 격상은 이러한 '현장 중심 경영'과 맞물려 삼성전자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를 공고히 하려는 조치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삼성전자는 조만간 부사장 이하 임원 인사와 조직개편을 추가로 발표할 예정이다. 올해 MX·DX 분야에서 외부 인재를 잇달아 사장급으로 영입한 만큼 AI·반도체·완제품 기술 중심의 '연중 인재 발탁' 기조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업계는 차세대 리더군 확충과 AI 시대 대응 조직 재편을 통해 이 회장이 구상하는 '뉴 삼성' 밑그림이 더욱 분명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