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서학개미들을 깜짝 놀라게 한 뉴스를 딱 하나만 꼽자면 우리에게 '오마하의 현인', '가치투자 대가'로 잘 알려진 워런 버핏의 TSMC 매수 소식이다. 평소 전통 산업을 선호하면서 빅테크 투자에는 신중했던 그이기에 이번 행보는 이례적으로 여겨진다.
버핏이 반도체 업황 회복과 더불어 미국의 기술패권 정책 변화에 베팅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세계 최대 파운드리(비메모리 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의 높은 투자 가치가 또 한 번 주목받는 분위기다.
뉴욕증시는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매파적 태도에 등락을 반복하고 있다. 미국 경기 사이클이 견조하게 나타나면서 연준의 정책 기조 전환을 어렵게 하는 모습이다. 당분간 연준의 통화정책과 금융시장 간의 균형을 찾는 과정이 지속될 것으로 관측된다.
버핏, 41억달러 들여 TSMC 지분 인수
지난 14일 버핏의 투자회사 버크셔 해서웨이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투자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버크셔는 지난 3분기에 41억달러(약 5조5000억원)를 들여 TSMC가 미국 증시에서 발행한 주식예탁증서(ADR)를 6000만주가량 사들였다. 버크셔가 TSMC 주식을 매입한 건 이번이 처음으로, 이번 매입 규모는 버크셔의 3분기 총 주식 매입액 약 90억달러(약 12조원)의 절반 가까이 된다.
가치투자를 투자의 기본 토대로 삼는 버핏은 그간 기술주 투자에는 거리를 뒀다. 그러면서 주주들에게는 자신이 하이테크 기업의 운영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비즈니스의 가치를 평가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버핏의 기술주 투자관은 최근 몇 년 새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애플이 대표적이다. 지난 2016년부터 투자를 시작해 현재는 포트폴리오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다.
TSMC는 '파운드리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대만 반도체 기업이다. 반도체 산업의 불황 속에서도 거침없는 성장세를 보이며 지난 3분기에는 삼성전자를 꺾고 세계 반도체 매출 1위를 꿰찼다.
버핏의 TSMC 매수 배경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이 제기된다. 우선 반도체 업황의 회복 기대다.
올 들어 글로벌 경기 침체가 본격화하면서 미국 반도체업종 대표지수인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는 연초 대비 16% 넘게 떨어졌다. TSMC 역시 역대급 하락세를 기록했다. 대만 증시에 상장된 TSMC는 작년 12월 고점 대비 하락폭이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비슷하고 ADR 기준으로는 금융위기 때보다 낙폭이 더 크다. 업계에선 반도체 업황이 내년 2분기를 기점으로 회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따라서 버핏이 풍부한 성장성을 보유한 파운드리 최강자 TSMC를 대상으로 저가 매수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사실 이보다 더 유력한 견해로는 중국과 기술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의 정책 변화를 고려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그간 중국을 견제하는 방법으로 동맹국들이 중국에 반도체·통신 등의 장비를 판매하지 못하게 했으나 올 8월 반도체·과학법 통과를 계기로 동맹국들이 자국에 투자하도록 회유하는 방식으로 선회했다. 이는 버크셔가 TSMC를 매수한 시기와 맞물린다.
하인환 KB증권 연구원은 "미국의 대중 기술패권 견제 방법 변화의 중심에 비메모리 반도체가 있다"며 "지금까지 반도체 산업, 특히 비메모리가 미·중 갈등 속 제재에 따른 리스크 분야였다면 앞으로는 미·중 갈등 속 기술 우위를 위한 투자 분야가 될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연준 정책 기조 변화 쉽지 않네
뉴욕증시는 연준 인사들이 잇따른 매파적 발언에 휘둘리며 좀처럼 반등 동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에 지난주 다우존스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나스닥 등 3대 지수는 하루가 멀다고 등락을 반복했다.
연준 내 대표적인 매파 인사인 제임스 불러드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연은) 총재는 지난 17일(현지시간) "정책금리가 아직 충분히 제한적이지 않다"면서 "기준금리는 최소 5% 대여야 하며 상한선은 7%에 가까울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보다 하루 앞서 라파엘 보스틱 애틀랜타 연은 총재는 "통화 긴축은 아직 인플레이션을 심각하게 감소시킬 만큼 기업 활동을 제한하지 않았다"며 "물가 상승률을 연준의 목표치(2%)로 되돌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제한적인 정책을 취하려면 추가 금리 인상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주요 연준 인사들의 발언을 종합해보면 금리 인상 속도 조절에는 나서겠다면서도 금리 인상 종료 시점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상황"이라며 "추가적인 금리 인상 사이클이 이어질 것임을 시사한다"고 해석했다.
이처럼 연준 인사들이 매파적 발언을 쏟아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주택시장 지표 등의 경제지표가 위축세를 보이는 대신 경기 사이클을 나타내는 지표들은 여전히 탄탄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애틀랜타 연은은 지난 16일 미국의 4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4.4%로 제시했다. 이는 지난 3일 3.6%. 9일 4.0%보다 더 높아진 것이다. 예상보다 높은 성장률은 자칫 물가 압력을 다시 확대시킬 수 있는 만큼 연준으로서도 통화정책 기조 전환(피봇·Pivot)에 나서기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박상현 연구원은 "최근 미국 증시가 과도한 피봇 기대감으로 랠리를 보였다는 점도 연준 인사들로 하여금 매파적 발언 강도를 높이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