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고려아연을 둘러싼 경영권 분쟁의 양상이 바뀌는 모습이다. 그동안은 누가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하느냐를 위해 다퉜다면 이제는 이사회 장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다.
앞서 영풍과 MBK파트너스 연합은 고려아연 이사회를 대거 교체하기 위해 후보 14명을 추천했다. 사외이사 12명과 기타비상무이사 2명을 내세워 임시주주총회를 열어 이들을 새로 선임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맞서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은 이사회 의장직을 내려놓고 사외이사를 의장에 앉혀 이사회 독립성을 강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외국인 사외이사와 투자자 대상 기업설명(IR)을 전담하는 사외이사를 두겠다는 방안도 내놨다.
하지만 고려아연은 회사자금을 대량 투입해 자기주식을 매입해 놓고 다시 대폭 할인한 값으로 유상증자를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시장을 혼란에 빠트렸다. 고려아연이 내놓은 이사회 독립성 강화방안이 진정성있게 주주를 설득할 수 있으려면 지금까지의 고려아연 이사회는 얼마나 독립적이었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제도 개선 뿐만 아니라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구성원의 경험과 의지도 독립성 확보의 중요한 축이기 때문이다. ①자사주 매입‧유상증자 일괄 찬성한 사외이사
멀리 갈 것도 없이 가장 최근 사례를 살펴보자. 경영권 분쟁이 일어난 이후 고려아연은 MBK의 공개매수에 대항하는 자사주 공개매수를 진행했다. 자사주 공개매수를 결정한 건 두말할 것 없이 현 고려아연 이사진이다.
고려아연 이사회는 지난 10월 2일 320만9009주의 자사주를 공개매수방식으로 취득하겠다고 의결했다. 취득 가격은 1주당 83만원으로 앞서 MBK가 제시했던 공개매수 2차가격인 75만원보다 11% 높은 가격이었다.
이날 오전 9시에 열린 이사회에는 11명의 이사진이 참석했다.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최윤범 회장과 박기덕 사장, 정태웅 사장 등 사내이사 3명과 장형진 영풍 고문, 최내현 켐코 대표 등 기타비상무이사 2명, 이민호‧김도현‧김보영‧권순범‧서대원‧황덕남 6명의 사외이사가 참석했다. 반면 기타비상무이사를 맡고 있는 김우주 현대차 본부장과 성용락 사외이사는 불참했다.
이날 자사주 공개매수에 찬성한 이사진은 총 10명이다. 유일하게 장형진 영풍 고문만이 자사주 취득 정당성에 의문이 있다며 반대표를 던졌다. 과반수 이상 출석과 출석이사의 과반수 찬성으로 자사주 공개매수는 이사회를 통과했다.
자사주 공개매수 이후 곧 바로 진행한 일반공모방식의 유상증자 결의도 현 고려아연 이사회의 찬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해당 건은 자사주 공개매수가격(1주당 83만원)보다 한참 낮은 가격(1주당 67만원)에 증자를 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시장교란행위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10월 30일 오전 9시 열렸던 고려아연 이사회는 앞서 자사주 공개매수와 마찬가지로 13명의 사외이사 중 기타비상무이사를 맡고 있는 김우주 현대차 본부장과 성용락 사외이사만 불참한 채 진행됐다. 역시나 장형진 영풍 고문만 반대표를 던졌고 일반공모 유상증자도 이사회를 통과했다.
결국 고려아연 주가를 83만원으로 정한 것도 이를 다시 67만원으로 파격 인하한 것도 모두 현 고려아연 이사회가 결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견제 역할을 하는 사외이사는 없었다. ②10년간 단 한건의 반대도 없었던 이사회
그렇다면 경영권 분쟁 이전인 '과거의' 고려아연 이사회는 얼마나 독립적이었을까. 과거 이사회 활동 내역을 통해 사외이사가 이사회내 의사결정 과정에서 제대로 된 견제 역할을 했는지가 이사회 독립성을 가름하는 주요 기준이라 볼 수 있다.
고려아연이 사업보고서를 통해 공시한 최근 10년 간 이사회 주요 안건 결의내역을 보면 사외이사들은 단 한 번도 이사회에 올라온 주요 안건에 대해 반대표를 행사한 이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윤범 회장의 부친 최창근 명예회장이 회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인 2014년 당시 이사회가 논의한 주요 안건은 23건이었다. 주요 안건에 표결을 한 사외이사 7명 중 반대표를 던진 건수는 단 한건도 없었다. 전체 유효의결권수 115건(주요 안건 수×사외이사 수) 중 찬성표가 114건, 불참이 1건이었다. 사외이사의 주요 안건에 대한 찬성률은 무려 99%에 달했다
고려아연 사외이사들은 찬성행렬은 계속 이어져 △2015년 100% △2016년 97.2% △2017년 100% △2018년 100% △2019년 94% △2020년 99% △2021년 97.2% △2022년 89.2%를 기록했다.
최윤범 회장이 부친으로부터 회장직과 이사회 의장직을 물려받았던 2023년 이후에도 사외이사 찬성률은 98%를 기록했다. 올해 상반기까지 열렸던 이사회 주요 안건 역시 고려아연 사외이사들은 100% 찬성표를 던졌다. 보류나 기권, 안건 수정, 조건부 찬성 등도 없었다.
이사회 불참을 반대의사표시라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불참 건수를 반대표라 가정하고 수치를 계산해도 찬성률 수치가 압도적인 상황이다. 사실상 고려아연 사외이사들이 경영진과는 독립적으로 견제역할을 해왔다고 보긴 어려운 것이다.
③고려아연도 전형적 '한국식 거수기 사외이사'일 뿐
과거 및 현재 사외이사들의 활동 내역을 볼 때 최윤범 회장이 의장직에서 물러난다 해도 고려아연 사외이사들이 제대로 된 견제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특히 경영권 분쟁 상황임을 감안해도 자사주 공개매수 직후 유상증자 결정이라는 시장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에 대해 찬성표를 던졌다는 점에서 현 사외이사진들에 대한 믿음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다만 이러한 행태는 비단 고려아연 사외이사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 사외이사제도는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1998년 도입됐지만 경영진에 대한 제대로 된 견제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일명 '거수기'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어찌 보면 고려아연 사외이사도 전형적인 한국식 사외이사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을 뿐이다.
거수기 사외이사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한국만의 문화도 있다. 상당수의 국내 상장사들은 이사회 개최 전 미리 사외이사들에게 안건을 공개하고 아예 반대표가 올라올 안건은 이사회에 부치지 않고 있다. 즉 찬성표가 나올 안건만 이사회에 올라온다는 것이다. 고려아연도 일반적 안건을 다룰때 이사회 개최 전 어떤 안건을 논의할지 사전에 사외이사들에게 공개하는 과정을 거친다.
기업지배구조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이사회 개최 전에 수십 번 회동을 하고 반대표가 나오지 않도록 사전에 조율한 뒤 이사회를 연다"며 "한국은 아직 유교 국가이기 때문에 공식 안건에 반대하는 게 불편하다는 의식이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시장 논란을 증폭시킨 일반공모 유상증자 같은 건은 고려아연 스스로도 밝혔듯 '긴박한' 상황에서 나온 의사결정이란 점에서 충분한 사전조율 때문에 사외이사들의 반대표가 없었다고 판단하기도 어려운 대목이다.
고려아연은 여전히 경영권 분쟁 과정에 있고 주주들에 국가기간산업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최윤범 회장의 경영권을 지켜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경영권 분쟁이 지분 확보전에서 주주총회 표 대결로 넘어가면서 고려아연 지분을 들고 있는 국민연금, 소액주주 등에 대한 호소도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다.
그 호소가 주주들에게 효과를 발휘하려면 결국 이사회 독립성 강화에 대한 고려아연의 진정성이 필요하다. 한국식 사외이사 구조에서 벗어나 얼마나 독립성을 갖춘 이사회를 만드느냐가 핵심인 것이다. 현 사외이사에게 의장직을 이어주는 것으론 독립성이 강화됐다고 볼 순 없다. 일본 등 해외국가처럼 해외 전문경영인이나 은퇴한 CEO를 사외이사로 넣어 보다 강력한 독립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의장직에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것은 정관변경을 한 뒤 이사회에서 논의해야 한다"며 "현재는 누구를 사외이사로 할지 정하지 않았지만 외국인 사외이사 및 IR전담 사외이사도 추진하는 만큼 추후 의장직에 오를 사외이사 폭은 보다 넓게 봐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고려아연은 올해 연말 또는 내년초 열릴 것으로 보이는 임시주주총회에서 사외이사를 의장직으로 선임하는 정관변경을 추진할 예정이다. 현재 고려아연 정관은 회장을 맡은 사람이 이사회 의장직도 맡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 열리는 임시주총에서 정관을 바꾸면 최윤범 회장은 2년 만에 이사회 의장직에서 내려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