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사건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역사책의 내용이 바뀌기도 합니다. '그때 다른 결정을 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말이 익숙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꼭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하게 접하는 많은 제품에도 결정적인 '한 끗'이 있습니다. 특히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제품들의 경우 결정적 한 끗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절묘한 한 끗 차이로 어떤 제품은 스테디셀러가, 또 어떤 제품은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비즈니스워치에서는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들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려 합니다. 결정적 한 끗 하나면 여러분들이 지금 접하고 계신 제품의 전부를, 성공 비밀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희와 함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시겠습니까. [편집자]
#프롤로그 #짬밥러버 #까스활명수의위력 #광고아님
구내식당을 참 좋아합니다. 속칭 '짬밥'이라고도 하죠. 군대 제대하던 날 아침에도 짬밥 먹고 나왔습니다. 취사병들이 어이없어했죠. 그만큼 짬밥을 좋아했습니다. 구내식당의 장점은 메뉴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입니다. 직장인들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 중 하나가 점심시간일 겁니다.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고민도 커집니다. '오늘 점심엔 뭘 먹지?' 하는 고민이요.
구내식당은 이런 고민을 한 번에 해결해줍니다. 게다가 양껏 먹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구내식당은 '무한리필'이거든요. 대한민국 금융의 중심이라는 여의도에 회사가 있습니다. 여의도는 참 오묘한 곳입니다. 맛집이 넘쳐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딱히 이렇다 할 먹을 것이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신기하죠. 여의도 생활 20여 년이 다 돼가지만, 여전히 점심 메뉴 고르는 것은 어렵습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여의도 점심시간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술집들이 밤 9시까지만 영업해야 하니 자구책 찾기에 나선 겁니다. 낮에는 점심 뷔페, 밤에는 호프집을 겸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짬밥을 사랑하는 제게는 희소식입니다. 기존에도 이런 시스템으로 운영하는 곳들이 더러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많지는 않았습니다.
최근에 새롭게 점심 뷔페를 시작한 호프집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회사 동료와 점심시간을 이용해 방문했습니다. 6000원에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심지어 라면도 끓여 먹을 수 있습니다. 반찬은 6~7가지로 넉넉합니다. 계란 프라이도 무한리필입니다. 여의도에서 6000원에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행복합니다.
가장 설레는 순간은 접시를 들고 음식 앞에 섰을 때입니다. 욕심이 납니다. 배가 고픈데다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요동칩니다. 흥분지수가 올라가죠. 그래서 늘 첫 접시에는 음식을 많이 담습니다. 매번 후회하지만, 매번 반복하는 실수입니다. 자리에 앉아 사정없이 먹어줍니다. 어쩜 그렇게 맛있을까요. 웬만해선 맛없기 힘든 메뉴들입니다.
문제는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난 뒤입니다. 본전 생각이 납니다. 무한리필이라는 점이 자꾸 엉덩이를 들썩이게 합니다. '그래! 한 번 더'. 다시 한번 각 코너를 돕니다. 두 번째는 첫 번째에 먹었던 것 중 맛있었던 것들을 위주로 담습니다. 제육볶음 등이 대표적입니다. 두 번째 접시도 다 비웁니다. 음식 남기면 벌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란터라 어지간해서는 남기지 않습니다.
배가 불러도 너무 부릅니다. 회사로 돌아와 자리에 앉으면서 생각합니다. '너무 먹었어. 다음엔 적당히 먹어야지' 다짐을 하지만 그때뿐입니다. 점심 먹고 다시 일을 시작하려니 속이 부대낍니다. 졸리긴 또 왜 그렇게 졸린지요. 여러분들도 비슷한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웬만해서는 소화제를 먹지 않습니다. 워낙 소화를 잘 시키는 체질이기도 하지만 속이 더부룩해서 소화제를 먹어 본 경험도 별로 없어서입니다.
하지만 최근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 날도 점심뷔페에서 양껏 흡인한 후 자리에 앉았습니다. 평소보다 속이 더 많이 불편했습니다. 명치 끝이 묵직한 것이 체한 것 같기도 하고 속이 더부룩한 것이 영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과식 탓입니다. 그때 문득 '활명수를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결정적 한끗] 활명수편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활명수 생각이 났던 것 같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그길로 약국에 들러 '까스 활명수' 한 병을 샀습니다. 그리고는 반신반의하면서 까스 활명수를 마셨습니다. 오래전에 먹어본 탓에 맛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오묘했습니다. 약이더군요. 얼마나 지났을까요. 속이 점점 진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신기했습니다. 진짜로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 중에는 광고 아니냐고 하시는 분도 있으실 겁니다. 맹세코 아닙니다. 실제 체험기입니다.
활명수의 효과를 직접 체험하고 나니, 활명수가 지난 124년간 '소화제의 왕좌'를 지켜왔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겠더군요. 활명수와 좀 더 가까워진 기분도 들었고요. 그래서일까요? 활명수가 더 궁금해졌습니다. 찾아보니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고종 황제부터 탄산 전쟁에 이르기까지 그 조그만 병에 참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더군요. 이제 저희가 찾아낸 재미있는 활명수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볼까 합니다.
#황제만먹던소화제 #한방과양방의콜라보 #급체여안녕
많이들 아시겠지만, 활명수의 역사는 무척 오래됐습니다. 1897년에 처음 출시됐으니 구한말입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조선 시대부터입니다. 활명수를 제조해 판매했던 '동화약방'은 1897년 9월 25일에 설립됐습니다. 대한제국은 그로부터 보름 뒤에 선포됐으니 조선 시대부터 판매된 것이 맞을듯 합니다. 어찌 됐건 역사책에서만 봤던 구한말의 제품이 지금까지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이 참 신기합니다.
활명수는 국내 최초의 소화제입니다. 궁중 선전관(宣傳官)이었던 민병호(閔竝浩) 선생이 처음 만들었습니다. 궁중 선전관은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경호실의 관리입니다. 민병호 선생은 무과에 급제하고 궁중 선전관으로 일하며 고종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셨습니다. 그런 만큼 고종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죠. 여기에는 고종 황제가 드셨던 소화제도 포함됩니다.
민병호 선생은 평소 의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고종 황제가 복용하는 각종 탕약 등도 유심히 살펴봤죠. 당시 조선에는 의료 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이 원장으로 있었던 제중원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 병원이 있었습니다. 알렌은 고종 황제의 신임을 얻었던 인물입니다. 그 덕에 고종 황제의 진료를 담당하기도 했죠. 민병호 선생은 이때 서양 의학에도 눈을 뜹니다.
궁중 선전관을 그만둔 민병호 선생은 궁궐 근무 시절 눈여겨 봐뒀던 의술을 바탕으로 인생 2막을 엽니다. 이때 탄생한 것이 바로 '활명수(活命水)'입니다. 활명수는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의미입니다. 민병호 선생은 궁궐 근무 시절 봐왔던 고종 황제의 소화제 비법에 제중원에서 배운 양약 성분을 합해 활명수라는 제품을 만듭니다. 한약 베이스에 서양의 생약 성분을 첨가한 겁니다.
민병호 선생이 소화제를 선택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밥을 많이 먹었습니다. 정말 많이 먹었습니다. 당시의 밥그릇만 봐도 지금의 몇 배는 됩니다. 한 끼에 지금 우리가 먹는 밥의 양에 3배가량은 더 먹었다고 하니 그 양이 대충 짐작되실 겁니다. 그러다 보니 급체와 토사곽란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민병호 선생은 이런 점에 착안했습니다. 급체와 토사곽란으로부터의 해방. 그래서 제품명도 활명수로 지었습니다. 사실 지금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무척 심각한 사회 문제였던 모양입니다. 심지어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 황제의 셋째딸 덕온공주도 급체로 사망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것을 보면 왕실이건 일반 백성들이건 급체에는 장사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만병통치약 #비싸도산다 #한병에2만원
활명수는 출시와 더불어 큰 인기를 얻습니다. 활명수가 급체와 토사곽란에 큰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너도나도 활명수를 구하기 위해 줄을 섰습니다. 1910년대 60㎖ 활명수 한병의 가격은 50전이었습니다. 당시 50전이면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2~3잔을 사 먹을 수 있는 고가(高價)의 제품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한 병에 약 2만 원가량이라고 합니다.
민병호 선생은 아들 민강(閔橿) 선생과 함께 1897년 한성부 서소문 차동(현재 서울시 중구 순화동 5번지)에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을 엽니다. 동화약방은 현재 동화약품의 전신입니다. 활명수는 동화약방에서 제조, 판매했습니다.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 활명수는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사람들에게 '만병통치약'으로 통하면서 활명수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습니다.
민병호 선생은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 덕분에 제중원에서 서양 의술을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제중원 원장이 의료 선교사였던 알렌이었으니까요. 더불어 자신이 다니던 정동교회 신도 등에게도 활명수를 나눠주면서 반응을 살피기도 했습니다. 당시 활명수는 민병호 선생의 이런 마케팅 노력에 힘입어 입소문이 났던 겁니다.
초창기 활명수의 용량은 450㎖였습니다. 현재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까스 활명수가 75㎖인 것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용량이었죠. 당시에는 이 활명수 큰 병에 원액을 담아 판매했습니다. 이 원액을 물에 타서 1~2시간가량 희석해서 복용했다고 합니다.
활명수가 불티나게 팔리자 수많은 아류작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동화약방은 분개하죠. 이에 동화약방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법을 선보이면서 '활명' 아류작들에 대응하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동화약방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도 큰 자취를 남기게 되는데요. 그 자세한 이야기들은 [결정적 한끗] 2편에서 풀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