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째 공회전 중인 실손의료보험 청구 간소화가 드디어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입니다. 실손보험금 청구를 전산시스템으로 구축하자는 논의에 정부·여당·금융당국은 물론, 일부 의료계까지 본격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번거로운 절차 때문에 소액의 실손보험금은 아예 포기했던 사례가 앞으로 크게 줄어들지 주목됩니다. 다만 일부에서는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보험소비자에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목소리도 많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차근차근 알아보겠습니다.
국민의힘 "실손 청구 간소화 중점추진"
4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최근 여당인 국민의힘은 "전세사기 방지 6대 법안과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위한 보험업법 등을 중점 법안으로 정하고 2월 임시국회에서 우선적으로 처리토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원회 의장은 "의료계가 이를 거부한다면 입법으로 처리할 것"이라고 했죠.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환자(실손보험 가입자)가 보험금을 청구할 때 의료기관이 증빙서류를 보험사에 자동으로 제출토록 하는 서비스입니다. 현재는 보험 가입자가 일일이 서류를 챙겨 보험사에 보험금을 청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국민의힘에 따르면 번거로운 절차 탓에 청구조차 안한 실손보험금이 최근 3년간(2020~2022년) 7400억원으로 추산됩니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를 통해 공론화됐지만 입법은 14년째 답보 상태였죠. 의료계가 개인정보 유출, 비급여 가격 통제 우려 등을 이유로 강하게 반대하고 있어섭니다. 하지만 관련 논의가 윤석열 정부 국정 과제에 포함되고 여당이 입법 강행 의사를 밝히면서 도입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미 금융위원회는 올해 업무보고에 청구 간소화 방안을 담았고요. 이와 더불어 한의사 단체인 대한한의사협회가 기존 반대 입장을 철회하고 찬성으로 돌아서며 의료계 공조 체계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습니다.(여기엔 한의 비급여도 실손보험 보장에 포함시켜 한의사들도 이득을 보려는 계산이 깔려있다는 게 보험업계의 시각입니다.)
낙전효과 포기한 보험사들 속내는?
보험업계로서는 당장 반가운 얘기는 아닙니다. 그동안 번거롭다는 이유로 안 하던 실손보험금 청구가 이뤄지면 더 이상 낙전효과를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청구 증가로 안 그래도 높은 실손보험 손해율(보험사가 받은 보험료 가운데 가입자에게 지급한 보험금 비율)이 더 가팔라질 것이란 예상도 나오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구 간소화를 추진하는 건 '1석 3조' 전략이 있어서입니다. 보험 보장을 완벽하게 대비한 보험소비자에겐 문제될 소지가 적습니다.
하지만 암보험 등 건강보험 보장체계를 다 갖추지 못했거나 보험 리모델링을 생각하고 있는 분들은 잘 챙겨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보험소비자들이 청구한 실손보험금 내역과 질병정보가 보험사에 남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런 기록들은 ICIS(보험신용정보통합조회시스템)를 통해 전체 보험사가 공유하게 됩니다. ▷관련기사 : [ICIS의 세계]①"내 보험가입이 거절 당했다"(2021년 10월 13일)
청구 간소화로 보험사에 오픈되는 실손보험금 청구 기록과 질병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새 보험에 가입할 때 조금 더 불리할 수 있다는 겁니다. 보험료가 할증되거나 부담보 조건이 붙거나 비싼 유병자보험으로만 가입해야 할 가능성이 더 높아질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보험가입이 거절되기도 하고요. 보험사들 입장으로서는 실손보험금을 내주는 대신 장기적으로 다른 건강보험 손해율 관리가 쉬워지는 측면이 있는 거죠.
4세대 실손보험 가입자들도 주의할 부분이 있습니다. 4세대 실손은 보험료가 저렴하지만 보험금을 탈수록 보험료가 급증하는 특징이 있죠. 비급여 진료를 받고 150만원 미만의 보험금을 받으면 100%, 150만원 이상 300만원 미만을 받으면 200%, 300만원 이상을 받으면 300% 보험료가 할증되는 데요. 청구 간소화로 보험금을 쉽게 받을 수 있게 되면 보험료가 불어날 확률도 그만큼 높아지겠죠.
보험업계는 효율적인 업무 활용을 비롯해 비용축소에도 긍정적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손보험금 청구 서류를 입력하는 인력이 줄면 관련 비용을 아낄 수 있고 업무 프로세스도 단출해질 테니까요. 이 과정에서 얻는 소비자 신뢰는 '덤'이고요.
지금까지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에 대한 장·단점을 알아봤는데요. 물론 구더기(새 보험가입·보험료 증가)가 무서워 장(실손보험금 청구)을 담그지 못하면 안 되겠죠. 아플 때 의료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보험에 들었으니까요. 다만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보험소비자에게 반드시 유리하기만 한 제도인지는 개개인별로 따져볼 필요도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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