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의 최종 의사결정은 내 책임 하에 이뤄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꺼낸 말이 아니다. 지금은 해체된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 곧 미래전략실의 수장이자 그룹 2인자로 불리던 최지성 전 부회장의 지난 2일 법정진술이다.
그는 "밖에서는 이 부회장이 최고 의사결정권자라고 하는데 삼성그룹의 운영체계나 풍토·방향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라고 했다.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뒤 그룹을 관리하고 이끈 사람은 최 전 부회장을 비롯한 미전실이지 이 부회장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최 전 부회장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자산총액 363조원의 재계 1위 그룹이 몇년간 2인자를 중심으로 집단지도체제처럼 운영돼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회장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형식적인 존재에 불과했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이후 재판과정에서 이 부회장 스스로도 "내 소속은 처음부터 삼성전자였다. 미래전략실에 한 번도 소속된 적이 없다"며 자신이 그룹의 의사결정을 좌우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밝혔다.
여느때 같으면 재계를 흔들 폭탄급 발언인데도 최 전 부회장과 이 부회장의 말은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이 부회장을 구하려는 삼성의 고육지책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법원의 판단은 어떨까?
이 부회장이 그룹 총수로서 주요 결정을 직접 내렸는지 아니면 삼성을 대표하는 얼굴로서 형식적 존재감만 유지해왔는지 가늠할 수 있는 1심 재판결과가 사흘 뒤인 오는 25일 나온다. 이 부회장이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구속된지 꼬박 190일만이다.
앞서 특검은 이 부회장에게 징역 12년을 구형했다. 최지성 전 부회장, 장충기 전 미전실 사장,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에게는 각각 징역 10년, 황성수 전 삼성전자 전무에게는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삼성은 전현직 그룹 수뇌부가 연루된 혐의에 대해 무죄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대통령의 요구를 거부하기 어려워 승마와 미르·K스포츠재단, 영재센터 등에 지원했을 뿐 경영권 승계 등을 위해 부정한 청탁을 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삼성은 국정농단 사건의 피해자라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이번 선고결과에 따라 삼성이 겪고 있는 경영차질의 장기화 여부도 결정된다.
당장 금융감독원이 삼성증권의 초대형 투자은행(IB) 행보에 급제동을 걸었다. 이 부회장의 재판이 진행 중이라 발행어음 사업을 인가해주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삼성증권은 발행어음 사업의 인가요건을 맞추려고 자기자본을 4조원 이상으로 확충했는데 언제 끝날지 모를 재판결과를 기다리는 처지에 빠졌다.
삼성전자의 경우 반도체 호황 속에 역대 최대규모의 투자를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투자계획은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 삼성전자의 경영전략과 투자, 인수합병 등을 결정하는 경영위원회는 올해 들어 5차례만 열렸다. 2015년과 2016년 상반기 각각 7차례였던 것에 비해 회의횟수가 줄었고 안건 자체도 기존 사업의 추가 투자를 결정하는 선에 그쳤다.
특히 지난해 상반기엔 해외법인 설립(3건)과 지분인수(2건), 특허계약 체결(2건) 등의 안건이 가결됐으나 올해는 이 같은 M&A 안건이 단 한차례도 다뤄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M&A처럼 그룹 핵심경영진의 전략적 판단이 필요한 분야에서 이 부회장과 최 전 부회장 등의 공백이 앞으로 더욱 크게 나타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전문경영인들은 아무래도 자신의 임기 내 성과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며 "장기적이고 막대한 금액이 들어가는 대형사업은 오너가 아니면 결정이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삼성은 초조하게 재판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판결이 좋게 나길 기다릴 뿐 재판 이후 상황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며 말을 아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