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20층.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삼성·현대차·SK 등 10대 그룹 전문경영인과 정책간담회를 갖기에 앞서 기자들 앞에 자리를 잡았다. 금속노조 기아차 비정규직지회 소속 노조원들이 "재벌갑질 처벌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사장에 들어와 잠시 소동이 일었지만 김 위원장은 미리 준비한 모두발언을 차분하게 읽기 시작했다.
큰 줄기는 공정위가 엠바고(일정 시점까지 보도하지 않는 것)를 전제로 기자들에게 배포한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재벌개혁에 대한 각계의 평가를 언급하는 대목에선 사전에 뿌린 원고보다 더욱 자세한 설명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전 배포자료에는 "양쪽의 비판을 모두 경청하고 있다", "균형을 잡으려고 한다" 등 밋밋하게 표현한 부분을 김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고쳐 말했다.
"한쪽에선 경제민주화를 곧 재벌개혁으로 동일시하면서 사전규제 위주의 경직적 수단으로 그것도 골든타임식의 시간을 정해놓고 재벌개혁을 빠르게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성급함이 재벌개혁을 실패로 이끈 한 원인이다.
다른 한쪽에선 경제의 어려움을 부각하면서 기업의 기를 살려 성장과 일자리로 연결해야 한다며 과거 낙수효과식 주장도 여전하다. 이런 과거회귀 움직임 역시 재벌개혁을 실패로 이끈 원인이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사회는 이 양극단의 위험 속에서 우왕좌왕해왔고 그래서 재벌개혁에 실패했다."
비판을 경청하고 균형을 잡는 이유가 단순히 기계적 균형을 맞추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철학과 소신에 바탕을 둔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7월 대한상의 조찬간담회에서도 "나이 들면서 현명함이랄까, 보수화를 거친 것 같다", "김상조가 말랑말랑해졌다, 심지어 우클릭했다는 평가도 받는다"며 자기고백을 앞세웠다.
재벌을 몰아세우기보다는 다독여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약 1시간에 걸친 간담회가 끝난 뒤에도 확인할 수 있었다. 김 위원장은 "딱딱한 법률 개정을 통해 변화를 압박하고 강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라며 "시간을 가지고 각 그룹에서 자발적으로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변화의 길이라는 데 참석자들이 공감했다"고 전했다.
실제 당근도 내놨다. 공정거래법을 개정할 때 과도한 형벌규정을 같이 손보고 대기업의 스타트업 투자시 문제가 될 수 있는 지주회사의 자회사 지분보유 요건 등을 완화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 김상조(왼쪽에서 다섯번째) 공정거래위원장이 10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10대 그룹 전문경영인과 정책간담회에서 공정위 정책방향을 설명하고 있다./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
대신 지킬 건 지켜줘야한다는 당부를 빠뜨리지 않았다. 일감몰아주기가 대표적인 예다. 그는 모두발언에서 "일감몰아주기는 중소기업의 희생 위에 지배주주 일가에게 부당을 이익을 몰아주고 나아가 편법승계와 경제력 집중을 야기하는 잘못된 행위"라고 규정한데 이어 실제 간담회에선 재벌들이 부담을 느낄 만한 제안을 했다.
김 위원장은 "지배주주 일가는 가능한 한 주력 회사의 주식만 보유하고, 비주력·비상장사의 주식은 보유하지 않는 방안을 참석자들에게 부탁했다"며 "우리사회 발전을 위해 선제적으로 노력해야할 부분 중 하나로 말씀드렸다"고 공개했다.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문제와 관련한 언급도 이어졌다.
그는 "이재용 부회장-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현재의 출자구조는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삼성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결정이 늦어질수록 삼성과 한국경제가 치러야하는 비용이 더 커질 것이다.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문제는 틀림없지만 결정하지 않고 시간을 그냥 보내는 것이 가장 나쁜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간담회에 참석한) 삼성의 윤부근 부회장에게도 똑같은 취지로 말했다"며 "윤 부회장은 '깊이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