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언맨 시리즈에는 '워머신'이라는 슈트가 등장합니다. 주인공 토니 스타크의 친구인 공군장교 제임스 로드가 입고 활약했던 그 슈트입니다. 어깨에 기관총을 걸치고 나온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우리말로 바꾸면 '전쟁기계'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이름입니다.
이런 워머신이 실제 활약하고 있다면? 영화와 달리 현실에 존재하는 워머신은 하늘을 날지도, 총을 쏘지도, 악당을 제압하지도 않습니다. 주주명부에 조용히 이름만 올려놓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시못할 존재감이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구요?
◇ 현실 속의 '워머신'
먼저 SK실트론의 올해 반기보고서를 보겠습니다. 참고로 SK실트론은 반도체 웨이퍼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지난해 1월 SK㈜가 LG실트론을 인수해 이름을 SK실트론으로 바꿨습니다.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실적도 좋은 회사입니다.
'주주에 관한 사항'에는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주요 주주 현황이 나옵니다. SK㈜가 51%로 가장 많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 생소한 이름이 보이십니까?
'키스아이비제십육차', '워머신제육차', '더블에스파트너쉽2017의2', '워머신제칠차'. 이 주주들이 SK실트론의 지분 49%를 보유한 것으로 나옵니다. 워머신도 그 중 하나구요. 총 1314만주(19.6%)가 워머신 6차와 7차 명의로 돼있네요.
워머신은 서류상으로 존재하는 페이퍼컴퍼니입니다. 실제 관리는 NH투자증권이 합니다. 페이퍼컴퍼니를 만든 누군가가 워머신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아이언맨 못지 않은 전투력을 지녔음에도 주인공 자리를 탐하지 않고 묵묵히 제 역할을 하는 워머신처럼 당신을 돕겠다는 의미를 담고 싶었던 걸까요?
그래도 그렇지 전쟁기계라니…. SK실트론은 졸지에 전쟁기계를 주주로 두는 웃지못할 상황인 된 거죠. NH투자증권에 왜 이런 이름을 붙였는지 물었지만 돌아온 답은 "누가 지었는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른다"였습니다.
◇ 운전대는 SK㈜ 손에…
워머신의 주된 역할은 SK㈜를 대신해 주주역할을 해주는데 있습니다. 워머신이 보유한 주식은 원래 LG실트론의 주주였던 KTB PE가 갖고 있던 건데요. 지난해 1월 SK㈜가 ㈜LG로부터 LG실트론 지분 51%를 인수하는 계약을 맺자 '낙동강 오리알'이 될 것을 걱정한 사모펀드와 금융기관이 자신의 지분(49%)도 사달라며 SK㈜에 매입을 요구했던 지분 가운데 일부입니다.
SK㈜는 이미 지분 51%를 확보해 경영권을 행사하는데 무리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제3자가 LG실트론 지분을 가져가는 것도 탐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정관변경처럼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려면 주주총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필수인데 당시 SK㈜의 지분은 그에 못미쳤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사모펀드들이 중국기업에 LG실트론 지분을 넘기면 잠재적 경쟁자를 회사경영에 참여시켜야 하는 등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점도 걱정한 것 같습니다.
몽땅 사기에는 부담스럽고, 놔두자니 꺼림칙한 지분이라서 그랬는지 SK㈜는 자신이 직접 사지 않고 증권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분을 사는 방식을 택합니다. 이 때 동원했던 게 총수익스왑(TRS, Total Return Swap) 계약인데요. SK실트론 주식에서 발생하는 이익이나 손실, 배당, 무상증자시 받게될 주식 등을 모두 SK㈜가 가져가고, 주식을 대신 사준 증권사에는 정기적으로 일정액의 수수료(프리미엄)를 지급하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장기 렌터카를 떠올리면 이해하기가 쉬울 겁니다. 차값을 한번에 내기엔 부담이 크니 렌털비용만 내고 끌고다닌다고 생각해보죠. 소유권은 렌터카업체에 있지만 이 차를 끌고 어디를 갈지 등은 렌터카 이용자가 결정합니다. 타다가 마음에 들면 아예 사버릴 수도 있습니다.
◇ 목돈 안들이고 지배력 굳히기
SK㈜의 TRS 거래가 그렇습니다. SK㈜가 사모펀드가 보유한 SK실트론 지분 19.6%를 직접 샀다면 1691억원(주당 1만2871원)의 현금이 있어야했지만, TRS 거래로 5년간 매년 54억원(연간 3.2%)만 내면 사실상 내 주식인 것처럼 SK실트론 지분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당시 5년 만기 회사채 금리(AA+ 등급 기준 2.4%)에 견주면 비용부담은 약간 더 생겼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크게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SK실트론이 주식시장에 상장하게 되면 대박을 칠 수도 있겠죠.
게다가 SK㈜는 석달에 한번씩 워머신이 가지고 있는 SK실트론 지분을 살 수 있는 권리(우선매수권)를 갖고 있습니다. 워머신이 딴 마음을 품어도 작동을 중지시킬 안전판을 마련해둔 겁니다.
문제는 이렇게 좋은 기회를 왜 회사가 전부 가져가지 않고 SK㈜의 최대주주인 최태원 회장하고만 나눴느냐는 지적이 나온다는 겁니다. 위에서 언급한 SK실트론의 주주명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키스아이비제십육차'와 '더블에스파트너쉽2017의2'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주주들도 페이퍼컴퍼니입니다. 각각 한국투자증권과 삼성증권이 설계했습니다. 작동원리는 워머신과 비슷합니다. SK실트론 주식에서 나오는 모든 이익과 손실을 누군가에게 주고, 그 누군가로부터 고정적인 수수료를 받습니다. 여기에서 누구란 최 회장을 의미합니다.
▲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TRS 거래를 통해 SK실트론의 지분 29.4%를 확보했다. |
◇ 또다른 페이퍼컴퍼니들
최 회장은 지난해 8월 SK㈜가 놔둔 SK실트론의 나머지 주식 1970만주(29.4%)를 TRS 거래를 통해 확보했습니다. 이 주식을 한꺼번에 사려면 2535억원(주당 1만2871원)이 필요했겠지만 TRS 거래로 목돈이 나가는 부담을 확 줄일 수 있었습니다. 대신 최 회장은 자신이 갖고 있던 SK㈜ 주식 160만주(2.3%)를 담보로 내놨는데요. 당시 시세로 치면 4300억원어치 주식입니다. 최 회장으로선 적지 않은 판돈을 건 셈입니다. 그럴만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SK그룹은 삼성과 함께 반도체 호황의 최대수혜자입니다. 반도체 수요가 늘수록, SK하이닉스로 주문이 몰릴수록 SK실트론의 성장세도 가팔라지겠죠.
실제 SK실트론은 2015년에는 SK하이닉스 매출이 1470억원(별도기준·비중 18.9%) 정도였지만 올 상반기에만 벌써 1490억원(24.2%)에 달합니다. SK실트론의 올 1~6월 전체 매출(6144억원)의 4분의 1을 SK하이닉스가 올려준 셈입니다.
SK하이닉스를 뒷배 삼아 SK실트론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1325억원으로 한해 전에 비해 300% 가까이 늘었습니다. 올해 상반기에는 1761억원의 영업이익을 냈습니다. 6개월간 번 돈이 지난해 1년간 번 돈보다 많았던 겁니다. 이쯤되면 회사를 보는 최 회장의 안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최 회장이 SK실트론 지분을 간접 인수한 것을 두고 논란도 있습니다. 잘 나가는 회사의 주식을 SK㈜가 아닌 최 회장이 확보토록 한 것은 회사의 사업기회를 총수 개인에게 떼어준 것일 수 있다는 겁니다. 흔히 '일감몰아주기'로 통칭되는 총수일가 사익편취 규제를 피하려고 꼼수를 쓴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습니다.
현행 공정거래법상 총수 일가의 지분이 20%가 넘는 비상장사가 부당한 내부거래를 했을 경우 일감몰아주기로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직접 지분을 소유했을 때의 일이지 TRS처럼 간접 소유한 것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런 허점을 노린 것 아니냐는 시각이 있었던 것이죠.
◇ 주목받는 TRS 거래
실제로 시민단체인 경제개혁연대는 공정거래위원회에 이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고, 공정위는 지난 8월말 SK㈜에 기업집단국 소속 조사관들을 보내 SK실트론 인수와 관련한 현장조사를 벌였습니다. 금융감독원도 이 같은 TRS의 매매와 중개를 해준 증권사를 제재할 방침입니다. 지난달 증권사 TRS와 관련해 금감원이 발표한 제재명단에는 NH투자증권·한국투자증권·삼성증권이 포함돼있습니다.
SK그룹은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라 걱정하는 눈치인데요. 이번 국감에서도 SK실트론은 회사의 기회유용 사례로 지목되기도 했죠. SK㈜는 회사경영에 충분한 지분을 확보해 추가적인 지분확대가 필요하지 않았고, 나머지 지분은 중국과 같은 잠재적 경쟁자에게 넘어가는 걸 우려해 최 회장이 대신 확보한 것인데 괜한 오해를 사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공정위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지켜봐야합니다. 다만 SK실트론이 돈을 잘 벌수록 워머신과 키스아이비 등 페이퍼컴퍼니에 대한 주목도가 커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보입니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일수록 주연뿐 아니라 조연과 스태프들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법이니까요.
현재 공정위는 공정거래법 전면개정을 통해 한층 깐깐하게 총수일가 사익편취를 손보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워낙 공정위의 칼날이 서슬퍼런지라 LG, 코오롱, LS 등 대기업들이 앞다퉈 말이 나옴직한 계열사나 사업부문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SK그룹도 예외가 아닙니다. SK디앤디·SK해운의 지분을 외부에 매각하고 내부거래비중이 큰 SK인포섹을 SK텔레콤에 넘기는 방안을 검토하는 등 교통정리에 분주한데요. '말 많은' SK실트론 논란에는 어떤 해법을 적용할지 살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