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응답하라! 혁신]SK, 사무실 확 뜯어고친 까닭

  • 2019.06.12(수) 13:10

[창간6주년 특별기획]
"칸막이에 갇히지 말라"..공유오피스로 자율·소통 강화
CEO도 변신중…'사장님' 호칭 내려놓고 "할말 하라" 독려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위치한 SK 서린사옥은 지난해 9월부터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다. 오는 10월 공사가 마무리되면 정해진 자리에 출근해 상사의 눈도장을 찍고, 매일 보는 얼굴을 또다시 마주하는 익숙한 사무실 풍경을 더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이미 지난 4월 1차 공사를 마치고 SK이노베이션·SK에너지·SK트레이딩인터내셔널 소속 임직원들은 서린사옥 14~19층에서 소속 회사와 조직간 구분없이 자율적으로 자리를 선택해 일하고 있다.

기존의 사무공간이 한곳에 머물며 정해진 시기에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농업적 근면성을 요구하는 곳이었다면 달라진 공간에선 수렵과 채집을 위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적 습성을 요구한다.

집중력과 속도, 도전 등의 가치가 중요해진다는 뜻이다. 출근하면 어제의 그 사람이 아닌 새로운 사람을 보게 되고, 우연한 만남과 교류로 미처 알지못한 가치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SK는 이런 공간을 '공유 오피스'라고 표현했다. 각자의 자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함께 나누면 더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에 깔고 있다.

공유 오피스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해 초 신년사에서 '일하는 방식의 혁신'을 주문한 뒤 급물살을 탔다.

최 회장은 "근무시간의 80% 이상을 칸막이에서 혼자 일하고 만나는 사람도 인사만 나눈 사람을 포함해도 20명이 안 될 것인데, 이렇게 일하면 새로운 시도와 비즈니스 모델 변화는 가능하지 않다"며 변화를 당부했다. 그 뒤 SK는 서린사옥 내부를 통째로 바꾸는 실험에 돌입했다.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위치한 SK 서린사옥. 지난해 9월부터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이다./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 눈도장은 그만…달라진 사무실

서린사옥 공유오피스는 크게 업무공간인 '워킹 존(Working Zone)'과 건강관리, 식당 등 구성원 편의를 고려한 '퍼블릭 존(Public Zone)'으로 나뉜다. 워킹존은 다시 개별근무 공간인 '포커스 존(Focus Zone)'과 전체 입주사의 공유·협업 공간인 '라운지(Lounge)'로 구분된다.

포커스존에는 주로 모니터가 설치된 책상과 회의실이 있다. 일에 몰입하고 싶은 직원들은 칸막이 공간을, 서서 일하고 싶은 직원들은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모션 데스크를 선택하면 된다.

라운지는 임직원들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오픈형으로 만들었다. 다양한 형태의 의자와 소파를 둬 자유롭게 업무와 미팅을 할 수 있다.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도록 씨리얼과 토스트기, 커피머신, 우유를 배치했다.

그렇다면 각자의 좌석은 어떻게 정할까? 임직원들은 출근 30분 전부터 사내 어플인 '온 스페이스(On Space)'로 좌석을 예약한다. 출근하면 예약한 좌석에 전자명패가 나타난다. 전화도 '오피스 폰(Office Phone)'이라는 사내 어플을 이용한다. 외부에서 사무실로 전화를 걸면 본인의 휴대폰으로 연결된다.

현재 서린사옥뿐 아니라 SKC, SK C&C 등도 이와 비슷한 공유 오피스를 도입해 시행 중이다. SK E&S, SK루브리컨츠, SK종합화학도 서린사옥 맞은편 건물 '그랑서울'에서 공유 오피스를 운영하고 있다.

SK 서린사옥에 마련된 공유 오피스에서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직원들은 소속 회사와 조직간 구분 없이 자율적으로 자리를 선택해 앉는다./사진=SK 제공

◇ "별 다섯개 중 네개"

SK의 공유 오피스는 재계에서도 주목받는 실험이다. 성공하면 다른 그룹보다 먼저 혁신에 성공한 사례로 남을 것이고 실패하면 사무실 인테리어에 괜한 돈을 썼다는 놀림을 받을 수 있다.

실제 공유 오피스처럼 개방된 사무공간이 주의산만으로 직원들의 집중력을 떨어뜨린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또 소통 활성화라는 당초의 목적과 달리 직원들 각자가 마치 섬처럼 흩어져 대면접촉에 더욱 소극적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프로그램 개발 등 여러 분야의 협업이 필요한  IT기업이나 광고회사처럼 창의적 아이디어가 필수인 분야라면 몰라도 정해진 스케줄과 안정적인 생산관리가 중요한 제조업에서 공유 오피스가 꼭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공유 오피스에 근무하는 SK 직원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사무실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는 불만도 있지만 젊은 직원들 입장에선 매일 새로운 환경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어 좋다"며 "별 다섯개중 네개 이상 주고 싶다"고 말했다. SK C&C 소속 한 팀장급 관리자도 "직원들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측면에서 공유 오피스가 바람직한 접근"이라며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 직급·호칭 파괴에 담긴 뜻

SK 역시 사무 공간을 바꾼다고 일하는 문화가 단숨에 바뀔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는다. 공유 오피스를 통해 물리적 변화를 꾀했다면 남은 건 직원들 사이에 남아있는 심리적 벽을 허무는 일이다. 이미 주요 최고경영자(CEO)를 중심으로 변화가 시작됐다.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겸 SK브로드밴드 사장은 사내에서 'JP'로 통한다. JP는 박 사장의 영문 이름인 'Jung Park'의 앞글자를 딴 호칭이다. 그는 지난 1월 서울 중구 SK브로드밴드 본사에서 열린 '행복한 소통 토크 콘서트'에서 자신을 "사장님 대신 JP라고 불러달라"고 한 바 있다. 수평적 기업문화 정착에 본인부터 앞장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앞서 SK텔레콤은 지난해 1월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사내 호칭을 직급 대신 이름 뒤에 '님'을 붙이는 방식으로 통일했다.

SK하이닉스도 올해부터 선임·책임·수석으로 나뉘어 있던 기술사무직 직원들의 호칭을 'TL'로 바꿨다. TL은 기술 리더(Technical Leader), 재능 있는 리더(Talented Leader) 등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세대·직위·직군간 소통을 강화하고 자발적 의견 개진을 활성화하기 위해 호칭을 통일했다"고 설명했다.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은 '할 말 하는 문화'를 강조한다. 팀 조직의 경계를 허물어 유기적으로 협업하는 '애자일(Agile)' 조직을 전사적으로 도입했다. 이를 위해 팀장이란 직책을 없애고 '프로페셔널 리더(PL)'가 단위업무를 책임지고 수행토록 했다. 팀원-팀장-실장-부문장으로 이어지는 기존 의사결정 구조를 단순화한 것이다.

SK그룹은 일하는 방식의 혁신을 추진 중이다. 그 일환으로 공유 오피스를 도입했다. 여기에는 '행복론'을 강조하는 최태원 회장의 의지가 반영돼있다. 사진은 지난 1월8일 서울 종로구 SK 서린사옥에서 열린 '행복 토크'의 한 장면이다. 최 회장과 직원들이 행복키우기를 위한 작은 실천 방안을 토론하고 있다./사진=SK 제공

◇ '꼰대' 임원들도 변하라

SK의 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는 것에는 그룹 총수인 최 회장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최 회장 올해부터 직원들과 직접 소통하는 '행복 토크'를 진행하고 있다. 직원들과 접촉면을 넓히는 동시에 '꼰대' 취급받기 쉬운 임원들에게도 변화를 수용하고 주도하라는 신호를 주고 있는 셈이다.

그 일환으로 SK는 올해 하반기 임원 직급을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직급 폐지로 부사장·전무·상무의 구분이 없어지고 호칭도 본부장·실장 등 직책으로만 부르게 된다. 경직된 한국식 직급 문화에서 벗어나 임원을 관리자보다 핵심 플레이어로 활용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임원의 상징인 전용 차량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최고경영자를 제외하고 출퇴근이나 가까운 거리는 자신이 직접 운전해야 한다. 장거리 출장에는 공용 운전사를 배정받는다. 상무는 그랜저나 K7, 전무 이상은 제네시스나 K9을 타는 관행도 깼다.

대신 직원들의 행복지수는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SK그룹의 컨트롤타워인 SK수펙스추구협의회와 지주사인 SK㈜ 등 일부 조직에서 도입하기 시작한 격주 주4일 근무도 행복 추구의 일환이다. 최 회장은 올해 초 "회사의 제도 기준을 '관리'에서 '행복'으로 바꿔야 한다"며 "단순히 제도만 만들 게 아니라 실제적인 시행과 적극적 참여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SK 관계자는 "SK가 추진 중인 일하는 방식의 혁신은 궁극적으로 구성원들의 행복을 키우기 위한 것"이라며 "구성원들이 행복해야 창의적이고 자발적인 의견들이 수평적으로 나올 수 있고, 이는 다시 기업이 생존하고 지속적인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말했다.

혁신(革新). 묵은 제도나 관습, 조직이나 방식 등을 완전히 바꾼다는 의미다. 과거 한국 기업들은 치열한 변화를 통해 성장을 이어왔고, 유례를 찾기 힘든 역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성장공식은 이미 한계를 보이고 있다. 성장이 아닌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로 몰리고 있다. 비즈니스워치가 창간 6주년을 맞아 국내외 '혁신의 현장'을 찾아 나선 이유다. 산업의 변화부터 기업 내부의 작은 움직임까지 혁신의 영감을 주는 기회들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새로운 해법을 만들어 내야 하는 시점. 그 시작은 '혁신의 실천'이다. [편집자]

naver daum
SNS 로그인
naver
facebook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