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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지다]삼성가 3남의 다난했던 여정

  • 2020.10.25(일) 16:49

사진으로 본 이건희 삼성 회장 일대기
'유학 레슬링 반도체 올림픽 X파일 사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서울 일원동 서울삼성병원에서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2014년 5월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지 6년5개월 만이다.

이건희 회장 유년시절. /사진=삼성

이 회장은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고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3남5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아들 중에는 막내였다. 경남 의령 친가에서 할머니 손에 자란 그는 1945년 해방 이후 어머니와 형제들을 만났다. 대구에서 유년기를 보내다 1947년 사업 확장에 나선 아버지를 따라 상경했다.

초등학교 5학년(11살)이었던 1953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선진국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엄명을 따른 것이었다. 당시 첫째 형인 고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은 도쿄대학 농과대학에, 둘째 형인 고 이창희 새한미디어 회장이 와세다대학을 다녔는데 이 회장은 둘째 형과 같이 지냈다.

1950년대 일본 유학 시절 이건희 회장./사진=삼성

형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이 회장은 외로움을 달래려 애완견을 키웠다. 1979년에는 일본 세계견종종합전시회에 순종 진돗개 한 쌍을 출전시키기도 했다.

유학 생활을 마친 후 서울사대부속중학교에 편입해 서울사대부속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 레슬링부 활동을 하며 전국대회에서 입상도 했다.

서울사대부고 졸업 후에는 와세다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조지워싱턴대학교경영학대학원에 진학해 경영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학업을 마친 1966년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재학 중이던 홍라희 여사를 만났다. 홍 여사가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4월에 결혼했다.

1970년대에는 미국 실리콘밸리를 견학하며 신산업 사업 전략을 구상했다. 반도체 산업을 눈여겨보던 이 회장은 한국반도체가 파산 위기에 직면했을 때 아버지에게 인수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이 회장은 자신의 돈으로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한 뒤 반도체 기술이전을 받아오기 위해 실리콘밸리를 50여 차례 드나들었다.

1987년 회장 취임식 당시 이건희 회장. /사진=삼성

삼성그룹 후계자로 본격적인 경영 수업을 시작한 것은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부터다.

형들을 제치고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데에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한비 사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59톤의 사카린 원료가 밀수품으로 적발됐는데, 여기에 친형들인 이맹희, 이창희 씨가 관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병철 회장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제계에서 은퇴했지만, 이맹희 씨가 총수 대행에 오른 이후 그룹이 혼란을 겪자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을 맡기기로 결단을 내렸다. 결국 이건희 회장은 1987년 회장에 취임했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이건희 회장. /사진=삼성

회장 취임 5년차인 1993년 이 회장은 '인간중시'와 '기술중시'를 토대로 질 위주 경영을 실천하는 '삼성 신경영'을 선언하고 경영 전 부문에 걸친 대대적인 혁신을 추진했다. 학력과 성별, 직종에 따른 불합리한 인사 차별을 타파하는 열린 인사에도 힘썼다. 사회공헌활동도 기업에 주어진 또 다른 사명으로 여기고 이를 경영의 한 축으로 삼도록 했다.

또 그는 학창시절 레슬링 등 스포츠와 인연을 맺은 것을 계기로, 스포츠를 국제교류와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중요한 촉매제로 인식했다.

199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선정됐고, 1997년부터 올림픽 TOP 스폰서로도 활동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꾸준히 스포츠 외교 활동을 펼쳐 평창이 아시아 최초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는데도 기여했다.

1997년 올림픽 파트너 계약을 체결하는 이건희 회장. /사진=삼성

글로벌 대표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는 삼성그룹 총수로서 숱한 정격유착과 비리 의혹에 시달렸다.

처음으로 검찰 조사를 받은 것은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조성사건에 연루되면서다. 그는 총 4회에 걸쳐 100억원의 뇌물을 공여한 혐의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1997년 개천절 특사로 특별사면 됐다.

2005년에는 삼성 임원진이 정치권과 검찰에 금품제공을 논의한 것이 녹음파일 형태로 폭로된 '삼성X파일' 사건이 터졌다. 이 회장은 서면조사 후 무혐의처분을 받았다. 2007년에는 김용철 변호사가 비자금을 폭로해 이 회장은 2009년까지 네 차례의 재판을 거쳤다.

그는 삼성SDS에 신주인수권부사채 발행 관련 227억여원의 손해를 끼친 점 등이 혐의로 인정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이 확정됐다. 이후 2009년 12월31일자로 특별사면 됐다.

건강문제가 생긴 것은 1990년대 후반이었다. 이 회장은 1999년 말부터 2000년 초 폐 부분에 림프암이 발병해 미국 MD앤더슨 암센터에서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2014년 5월에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쓰러졌다.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져 장기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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