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재계는 간단치 않은 경영 환경을 맞고 있다. 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은 풀리지 않았고 주요 기업 내부에도 해결할 과제가 산적했다. 소의 해, 신축(申丑)년을 호시우보(虎視牛步)로 뚫어야 할 대기업집단 총수들의 머릿속도 복잡할 수밖에 없다. 최고경영자(CEO)들의 경영 과제와 판단의 방향을 신년사 등에서 엿보이는 열쇳말과 함께 들여다봤다.[편집자]
최태원의 생각 '우리는 사회에 어떤 행복을 더할 수 있을까?'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2014년 10월 옥중에서 '새로운 모색, 사회적 기업'이란 책을 펴낸 이후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는 생각을 꾸준히, 또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는 당시 책에서 사회적 기업 활동 경험과 고민, 그리고 희망과 아이디어를 정리했다. 앞으로 사회적 기업 활성화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도 담았다.
그가 최근 3년 동안 참여한 신년회, 신년사에도 그런 다짐이 이어졌다. '행복', '사회적 가치'라는 말이 어김없이 나왔다.
지난해는 신년사 없이 일반 시민, 고객 등 외부 이해 관계자의 목소리를 청취하면서 구성원과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어 '행복과 딥 체인지(근본적 변화)를 고객, 사회와 함께 만들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2019년에도 주요 관계사 CEO들이 행복을 주제로 토론하고, 최 회장이 정리하는 신년회를 진행했다.
◇ "2021년, 새로운 기업가 정신 필요하다"
올해는 '새로운 기업가 정신'을 대표 키워드로 내세웠다. 최태원 회장은 신년회 없이 회사 구성원 상대로 이메일을 통해 신년 인사를 하면서 "SK의 성장은 사회가 허락한 기회와 응원 덕분"이라며 "사회와 공감하며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새로운 기업가 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에 쓰지 않은 신년회 예산은 결식 취약계층 지원에 보태기로 했다고 한다.
특히 팬데믹 같은 대재난은 사회 가장 약한 곳을 먼저 무너뜨리고 이로 인한 사회 문제로부터 기업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최 회장의 생각이다.
그는 수년째 줄기차게 강조한 '행복'이란 단어를 또 꺼냈다. 최 회장은 "지난 과거에 대한 반성을 통해 사회 전체에 행복을 더할 기업의 모습이 무엇일지 앞으로 계속 고민해 가겠다"며 "어려운 여건들이 우리의 행복 추구를 저해하지 못하도록 창의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기업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넘어 사회 통합의 역할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최 회장의 지론과 행보는 최근 재계가 그를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추대하려는 배경이 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역할이 희미해진 이후 대한상의 회장은 재계를 대표해 정부, 시민사회 등과 소통하는 자리다.
전문 경영인들은 '비장감'…
◇ SK이노 "지체할 시간 없다", 하이닉스 "스스로 길 만들자"
최 회장의 '행복추구'는 해마다 반복되고 있지만, SK그룹 안팎의 구성원을 만족시켜야할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은 더욱 긴박한 모습이다. 기업 경쟁력과 사회적 역할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유·화학·에너지 부문 SK이노베이션이 대표적이다.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은 신년사에서 "지속가능한 성장에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며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변화로 '뉴(New) SK이노베이션을 만들 것"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 "어렵고 힘든 변화의 여정에 앞장서겠다"는 비장한 각오도 밝혔다.
날이 선 배경은 분명하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2조3000억원이 넘는 대규모 적자가 예상된다. 코로나 여파로 정유사업에서 손실이 컸다는 분석이다. 신성장 동력인 배터리 사업 부문에선 LG화학과 소송전도 진행중이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인텔 낸드 사업 인수를 진행하고 있고 지난해 4조9000억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찍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분위기 자체는 이미 봄이 온듯하다. 그러나 글로벌 1등 기업이 되겠다는 포부에서 나타나는 긴장감은 한겨울 그 자체다.
박정호 신임 부회장은 SK하이닉스 신년사에서 "글로벌 테크 리더로 성장하려면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한 문화적 진화와 1등이 되겠다는 담대한 비전이 필요하다"며 "혁신의 시대에는 우리가 누구인지 고민하고 스스로 길을 만드는 '패스 파인더'(Path Finder)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부회장은 SK텔레콤 신년사에서는 "팬데믹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께 우리의 ICT(정보통신기술) 역량을 통해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보자"며 "사회 구성원과 이해 관계자에게 사랑받는 빅테크 기업이 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최 회장의 '오른팔'로 불리는 박 부회장은 올해부터 SK하이닉스와 SK텔레콤을 함께 이끈다.
◇ "더 큰 도약에는 사회적 공감 필요"
최 회장의 수 년째 '행복'에 꽂혀 있는 것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노태우 전 대통령 장녀와 결혼한 뒤 이혼소송까지 이어진 개인사, 분식으로 얼룩졌던 SK그룹의 역사 등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최 회장이 고민해 내놓은 '기업의 본질'에서 그리 복잡하지 않은 해답을 엿볼 수 있다.
최 회장 말대로 '사회 덕분에', 그러니까 사회가 있기에 기업은 상품을 만들고 팔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의 지지 없이는 어떤 기업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사회의 지지를 받는 기업은 무슨일이 있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고, 우뚝 설 수 있다는 경험칙이기도 하다. 일반적 의미의 순진한 행복 추구만은 아니다.
최 회장은 지난해 10월 개최한 'SK CEO세미나'에서도 재무 성과 중심의 성장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업가치를 확보해야 한다"며 "신뢰 받는 파이낸셜 스토리와 사회적 공감을 확보해 더 큰 도약을 이루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