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24일 24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선출됐다. 대한상의가 처음 문을 연 1884년 이후 4대 그룹 총수(SK그룹은 재계 3위)가 대한상의 회장을 맡은 것은 처음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유명무실해진 지금 대한상의 회장은 명실공히 재계를 대표하는 수장이다. 최 회장에 대한 재계 안팎의 기대는 그래서 더 크다.
그가 이끌 대한상의는 시작부터 새로운 것이 적지않다. 서울상의 부회장단에 젊은 정보기술(IT) 기업인들을 영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카카오 김범수 의장과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게임업체 크래프톤 장병규 의장, 이한주 베스핀글로벌 대표 등이 서울상의의 새 인물들이다.
우리 경제의 미래 먹거리인 IT 기업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경제단체의 늙수레한 이미지를 깨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상의는 대기업 중심의 활동 벽을 허물고 창업 활성화를 위해 샌드박스 사업을 계속 지원키로 했다. 또 지역 소상공인들을 지원하는 지역경제팀도 새로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보다 더 의미가 깊어 보이는 것은 재계 전반에 그가, 또 SK가 추구해온 변화의 색을 입히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대목이다. 이는 SK그룹의 이형희 SV(Social Value, 사회적가치)위원회 위원장을 서울상의 부회장으로 함께 데려온 것에서도 뚜렷하게 읽힌다.
SK그룹은 기업활동의 영속성을 위해서는 '경제적가치'와 '사회적가치'의 양립이 필수라는 최 회장 지론 아래 2015년부터 사회적가치 경영을 추구하고 있다. 최 회장도 사업 현안은 주로 전문경영인들로 구성된 수펙스추구협의회에 일임하고 '기업의 사회적 역할' 설파에 몰두하는 모습을 수 년간 보여왔다.
재계에서 그를 대한상의 회장에 추대한 배경에도 사회적가치를 강조하는 그의 꾸준한 행보가 있었다. 최 회장은 대한상의 취임 후 첫말로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적 가치 창출과 국가의제 해결에 경제단체들이 좀 더 적극적 역할을 수행해야할 것"이라며 "대한상의를 둘러싼 이해관계자들의 기대와 요구를 최대한 수렴해서 구체적인 방법론들을 찾아나가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한상의는 그가 꾸준히 강조해온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재계 전반으로 확대하기 위해 상의 내 기업문화팀을 'ESG 경영팀'으로 개편하기도 했다.
재계를 대표하는 자리에 올랐지만 최 회장은 한껏 몸을 낮추고 있다. 공식적으로 대한상의 회장에 오르기에 앞서 지난달 서울상의 회장에 추대된 자리에서 그는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다"고 했다. 재계 수장에 썩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로 이렇게 표현한 속내도 읽힌다. 자신이 소화하기 어려운 자리로 여겨지지만 열과 성을 다하겠다는 의지였을 테다.
다만 이런 말들이 힘을 가지려면 먼저 바루어져야할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사회적가치를 앞세우는 SK그룹에서 일어난 불편한 논란거리들 얘기다. 당장 최 회장 사촌형 최신원 회장이 받고 있는 SKC·SK네트웍스의 수천억원대 배임 횡령 혐의가 있고, SK이노베이션의 LG화학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이 있다. 이런 걸 그냥 뭉개서는 최 회장의, 그리고 SK의 사회적가치 추구는 공허해진다.
재계 수장으로 나설 최 회장의 말이 기업인들에게, 또 그가 앞으로 상대할 정치권과 시민사회에 먹히게 하려면 최 회장부터, SK그룹부터 먼저 바뀌어야 한다. 말로만 내세우는 '사회적가치', '이해관계자의 행복 추구'는 그저 기업의 제 잇속차리기를 포장하려는 헛된 구호에 그칠뿐이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하면 빛을 잃는다.
기업인들의 기를 살리는 것도 최 회장의 몫이다. 경제에 활력을 키우고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서는 이익집단으로서 경제단체의 역할도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큰 일을 하려면 큰 책임이 따른다. 최 회장이 본격적인 외부 활동에 앞서 SK 내부 문제를 어떻게 정리할지 모두의 눈이 쏠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