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재계는 간단치 않은 경영 환경을 맞고 있다. 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은 풀리지 않았고 주요 기업 내부에도 해결할 과제가 산적했다. 소의 해, 신축(申丑)년을 호시우보(虎視牛步)로 뚫어야 할 대기업집단 총수들의 머릿속도 복잡할 수밖에 없다. 최고경영자(CEO)들의 경영 과제와 판단의 방향을 신년사 등에서 엿보이는 열쇳말과 함께 들여다봤다.[편집자]
올해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새해 메시지에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안전'이다. 597개 단어짜리 새해 메시지에서 '안전'은 11번 등장했다.
2018년 수석부회장에 오른 그는 매년 새해마다 기술, 성장 등의 단어를 키워드로 내세웠지만 올해는 달랐다. 연초에 울산공장에서 협력사 직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생기면서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새해 메시지 머리글은 애도로 다시 쓰였고, 예정됐던 온라인 신년회는 취소됐다.
정 회장은 "우리의 모든 활동은 품질과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다.
◇ 다시 떠오른 품질과 안전
2019년 정의선 회장은 첫 신년사를 통해 새로운 출발선을 그었다. 아버지인 정몽구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인 품질경영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자동차 제조업의 추격자'가 아닌 '판도를 주도하는 게임체인저'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해 신년사엔 '성장'이란 단어가 8번, '미래'가 6번 나왔다.
그가 과거의 영광에 머물지 않겠다는 이유는 분명했다. 그해 신년사에 밝힌 대로 그가 수석부회장에 오를 때는 '상상과 미래의 영역으로 구분되던 일들이 현실이 되고, 새 게임의 룰이 형성되는' 격변기였다.
2020년 신년사엔 '품질'이란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안전'은 한 번만 등장했다. 대신 '기술'과 '미래'라는 단어가 자주 나았다. 그는 "2020년을 미래 시장에 대한 리더십 확보의 원년으로 삼자"고 강조했다. '카마겟돈(자동차와 종말의 합성어)' 시대에 품질과 안전을 되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올해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작년 '세타2 엔진'에 대한 3조3900억원대 품질비용 반영, 잇단 화재로 리콜에 들어간 전기차 '코나', 연초 발생한 안전사고 등이 '기본'을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올해 신년사에서 그는 "품질과 안전에 대해선 다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자세" 등 4차례 '품질'을 강조했다. 관련기사☞ '다 털어라' 회장 정의선의 첫 착수는 '품질'
"정몽구 회장이 끊임없이 강조한 품질, 안전, 환경에 대해선 한 치의 양보 없는 태도로 완벽함을 구현하겠다"는 2019년 신년사가 2년 만에 다시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셈이다.
◇ 기대 반 우려 반
2021년은 정 회장이 그간 준비해온 '미래'를 평가받는 해이다. 올해 1분기 현대차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E-GMP)을 기반에 둔 전기차 '아이오닉5'가 출시된다. 현대차그룹은 내연기관차 뼈대에 모터를 단 전기차로 지난해 전세계 전기차 판매량 4위까지 올랐다. 하지만 올해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으로 테슬라와 정면승부를 벌여야 한다. 최근 애플 등 글로벌 업체들이 현대차와 전기차 공동 개발에 관심을 보이면서 기대감은 더 높아지고 있다. 관련기사☞ 테슬라보다 낫다? 현대차 'E-GMP' 궁금점 셋
현대차그룹이 주도권을 쥔 수소 사업에 대한 기대도 크다. 작년 말 현대차그룹은 '2025 전략'을 수정하면서 수소 사업에 대한 투자 규모를 기존 6000억원에서 4조1000억원으로 6배 넘게 늘렸다. 하지만 수소차 대중화의 '척도'가 될 수 있는 수소전기차 '넥쏘'의 판매량은 계획보다 부진했다. 넥쏘의 작년 판매량은 5786대로 2019년보다 38% 증가했지만 작년 초에 세운 연간 판매 목표(1만100대)의 절반을 채우는 데 그쳤다.
대규모 미래 투자와 동시에 수익성을 높여야 한다는 중압감도 크다. 현대차의 2025년 차량사업부 영업이익률 목표는 8%. 금융부문 등을 포함한 현대차의 전체 영업이익률은 2018년 2.5%, 2019년 3.5%, 2020년 1~3분기 1.5% 등에 머문다. 2025년까지 미래사업 등에 60조원을 넘게 투자하면서 폭스바겐이 제시한 2025년 영업이익률과 맞먹는 수익을 내야 하는 난제를 풀어야 하는 셈이다.
"올해는 새해를 맞는 감회가 여느 때와는 많이 다른 것 같다. 지금까진 희망과 설렘의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했는데, 올해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함께 우려도 혼재돼 있는 듯하다"는 그의 올해 신년 메시지가 상투적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 승계, 이러지도 저러지도
작년 10월 한 행사장에서 정의선 회장은 지배구조 개편에 대해 묻는 질문에 "고민 중"이라고 답했다. 2018년 지배구조 개편 작업이 주주의 반대와 시장과 소통 부족으로 무산된 이후 고민은 2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10대 그룹 중 유일하게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형태를 가지고 있다. 지배구조 개편은 순환출자 구조를 끊고 정 회장이 현대모비스를 지배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정 회장이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은 0.32%. 이 지분을 늘리기 위한 '재원'은 그가 보유한 현대글로비스 지분 23.29%, 현대엔지니어링 11.72%, 현대오토에버 9.57%, 현대차 2.62%, 기아차 1.74% 등이다. 이 주식들을 어떻게 현대모비스 주식과 바꿀 것인가가 지배구조 개편의 핵심인 것이다.
업계에선 여러 시나리오가 나온다. 가장 유력한 방안은 현대모비스를 분할 상장한 뒤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는 2018년 방식을 재활용하는 것이다. 대신 현대모비스 주주의 반발을 줄이기 위해 모듈과 애프터서비스(AS) 사업 중 AS사업만 분할해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이외에 ▲현대차와 현대모비스를 각각 존속회사와 사업회사로 분할한 뒤 존속회사는 존속회사끼리, 사업회사는 사업회사끼리 합병 ▲현대차, 현대모비스, 현대체절, 기아차 등이 인적분할해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방안 등이 나온다.
고민이 길어지는 것은 승계의 가장 큰 재원인 현대글로비스가 일감 몰아주기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다. '현대글로비스 주식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2006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점도 부담으로 남아있다. 현대글로비스에서 일감 몰아주기 딱지를 떼어내는 동시에 지배구조 개편의 잡음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2018년과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선 정 회장의 결단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