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현대차그룹 핸들을 잡은 정의선 회장은 그룹이 향하는 목표를 바꿔 놨다. '일본 자동차에 뒤지지 않는 주행성능을 갖춘 튼튼한 차'를 만드는 것에서 '안전하고 자유로운 이동'으로다.
이 로드맵에 따라 현대차그룹은 완성차 회사에서 벗어나 로봇, 도심항공모빌리티(UAM), 수소 에너지 등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1등을 빠르게 쫓아가려는 '패스트 팔로워'에서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겠다는 '퍼스트 무버'로 지향점을 바꾼 것이다.
미래에 투자하는 현대차
정의선 회장의 취임 1년간 현대차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는 '투자 내역'이다. 지난 1~6월 현대차의 타법인출자는 2조130억원이었는데, 이 중 6619억원가량이 '안전하고 자유로운 이동'을 대비하기 위한 투자에 가깝다.
주요 내역을 뜯어보면 △미국 로봇 회사 보스턴 다이내믹스 4260억원 △미국에 설립한 제네시스에어모빌리티(GAM) 1102억원 △중국 수소연료전지 생산공장(HTWO광저우) 355억원 △미국 전기차 배터리 스타트업 솔리드에너지시스템(SES) 340억원 △국내 수소인프라 구축업체 수소에너지네트워크 103억원 등이다.
모빌리티 스타트업에도 초기 투자에 나서고 있다. 올해 발굴한 라이다 개발 업체 옵시스 센싱(Opsys Sensing)과 스마트 글라스 생산업체 가우지(Gauzy)에도 각각 15억원, 37억원을 투자했다. 2018년 첫 투자에 나선 배터리 개발사 솔리드파워엔 올해 10억원을 추가 집행했다.
그룹 전체로 보면 '안전하고 자유로운 이동'을 위한 투자 규모는 더 커진다. 현대차와 함께 현대글로비스와 현대모비스, 정 회장 등이 공동 투자한 보스턴 다이내믹스는 총 투자금이 1조원이 넘는다. 제네시스에어모빌리티엔 기아도 558억원을 투자했다.
'새로운 100년 상징' 높이 낮출까?
정 회장이 먼 미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룹 경영 전반을 책임지고 있는 그는 현안을 대할 때는 내실을 강조하는 실용주의자에 가깝다.
대표적인 사례가 현대차그룹이 추진 중인 삼성동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다. 현대차그룹은 2014년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를 10조5500억원에 매입해 국내에서 가장 높은 105층 빌딩을 세운다는 계획을 추진하다 최근 건물 높이를 낮추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다. GBC는 정 회장 부친인 정몽구 명예회장이 "그룹의 새로운 100년의 상징"이라고 치켜세운 곳으로, 높이를 낮추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다.
현대차의 올 상반기 타법인출자 현황에도 현재의 시장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는 자동차를 위한 투자가 여전히 더 많다. △HTV(현대차 베트남 법인) 3114억원 △HAOSVT(현대차 터키법인) 3007억원 △HTV(현대차 베트남 법인) 2859억원 △HMB(현대차 브라질법인) 2235억원 △HMMI(현대차 인도네시아법인) 1132억원 등 자동차 생산·판매 법인에 총 1조397억원을 투자했다.
정 회장이 2019년 부회장 시절 타운홀미팅에서 "그룹의 미래사업의 50%는 자동차, 30%는 UAM, 20%는 로보틱스가 맡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를 위해 착실히 투자에 나서고 있는 셈이다.
"작은 자존심 희생하겠다"
정 회장은 재계에서 보폭도 넓히고 있다. 재계 전반적으로 경영권이 3·4세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정 회장은 격식을 차리지 않는 낮은 자세를 보이며 그 중심에 서고 있다. 작년부터 정 회장은 삼성SDI천안사업장에서 이재용 부회장을, LG화학 오창공장에서 구광모 대표를, 포항 포스코 청송대에서 최정우 회장을 만났다.
정회장은 올해 열린 타운홀 미팅에서는 "큰 자존심을 위해선 언제나 작은 자존심을 희생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자문한 뒤 "우리 식구들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붓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재계 총수를 만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닌 것도 이 연장선에 있는 셈이다. ▷관련기사: [기자수첩]정의선이 내던진 알량한 자존심(3월17일)
정 회장은 정부와도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청와대 오찬, 기업 행사 등을 통해 20여 차례 문 대통령을 만난 것으로 집계된다. 어림잡아도 올해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자리에 오른 최태원 SK 회장보다 회동이 잦다.
지배구조 숙제, 어떻게 풀까
앞으로 가장 큰 과제는 지배구조 개편이다.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는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형태다. 10대 그룹 중 유일한 순환출자 구조로, 정 회장이 이 구조를 끊고 지분을 승계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2018년 추진했던 지배구조 변경계획은 미국계 행동주의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 등의 반대로 무산됐다.
정 회장은 자신이 보유한 현대글로비스 지분 23.29%를 통해 '묘수'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현대글로비스를 따라다니는 일감 몰아주기 꼬리표는 부담이다. 이 때문에 최근 정 회장이 개인적으로 2840억원을 투자해 지분 20%를 확보한 보스턴 다이내믹스가 주목받고 있다. 향후 4년 이내에 기업공개(IPO)를 계획하고 있는 보스턴 다이내믹스가 지배구조 개편의 '마중물'이 될 수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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