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급등락하는 국제 유가와 정제마진 소용돌이 속에서 국내 정유 4사(SK이노베이션·에쓰오일·GS칼텍스·HD현대오일뱅크)가 고부가가치 윤활기유로 견조한 수익성을 지켜내고 있습니다.
중동 분쟁에 따른 글로벌 원료난이 오히려 한국 정유사들에 사상 최대 수준의 수출 프리미엄을 안겨주고 있는 건데요. 고마진 시장에서 주도권을 쥐면서 실적 변동성을 상쇄해 줄 안전판 역할이 기대됩니다. 지정학 악재가 만들어준 역외 프리미엄

27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최근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긴장 여파로 윤활기유 공급 차질이 길어지면서 국내 정유사들의 수출 이익이 크게 확대되고 있습니다.
윤활기유는 우리가 흔히 쓰는 완제품 윤활유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기초 원료인데요. 중동발 중질유 공급이 줄어든 데다 글로벌 정유사들이 경유 생산에 설비를 우선 배정하면서 윤활기유 생산량 자체가 크게 제한된 영향입니다.
특히 이란과 미국 간 전쟁 과정에서 글로벌 메이저 석유기업인 쉘(Shell)의 카타르 윤활기유 공장과 사우디아라비아 사다라(Sadara) 등 중동 주요 생산기지가 직간접적 피해를 입은 것이 결정타가 됐습니다. 글로벌 윤활기유 공급의 약 10%를 담당하던 생산 라인이 내년 상반기까지 가동을 멈추게 되면서 글로벌 수급 불균형이 극에 달한 건데요.
이 같은 악재는 국내 정유 4사에 전례 없는 반사이익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관세청에 따르면 한국산 윤활기유의 톤당 수출 평균 단가(ASP)는 올해 3월 932달러에서 6월 1862달러로 껑충 뛴 데 이어 이달 초에는 2130달러까지 폭등했습니다.
실제 국내 정유 4사의 윤활기유 수출량은 지난 3월 107만5000톤에서 6월 97만1000톤으로 비슷하게 유지됐지만 같은 기간 총 수출액은 9억5600만 달러에서 16억1400만 달러로 무려 68.8% 급증했습니다. 물량을 무작정 늘리지 않고도 이익률이 높고 가격표가 비싼 서구권 시장으로 뱃머리를 돌려 순판매단가를 크게 높인 결과입니다.
시장에서는 이 같은 초강세가 이어질 경우 국내 정유사들의 윤활기유 이익이 가파르게 치솟을 것으로 봅니다. 이충재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공급 부족 지속으로 올해 에쓰오일은 윤활기유 부문에서만 1조5000억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가 집계한 에쓰오일의 올해 연간 연결 영업이익 컨센서스(시장 전망 평균치)가 3조5905억원임을 고려하면 전사 영업이익의 40% 이상을 윤활기유 한 품목에서 거둬들이는 셈인데요. 중동발 공급 차질이 길어질수록 정유사들의 윤활기유발 실적 모멘텀 역시 한층 단단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실적 변동성 상쇄해 줄 안전판 기대
시장에서는 최고급 윤활기유 제품군인 Group III(그룹 3)를 보유한 국내 정유사들의 입지가 한층 더 강화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룹 3 윤활기유는 원유를 초고압으로 가공해 불순물을 극도로 줄인 최고급 원료를 의미합니다. 기온 변화에도 끈적이는 점도가 일정하게 유지돼 고급 내연기관차는 물론 전기차 전용 윤활유나 데이터센터 냉각재로 쓰입니다.
보통 전기차가 늘면 엔진오일도 안 쓰니 윤활유 사업도 저물겠지라는 오해를 많이 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전기차에도 모터와 감속기 마찰을 줄일 오일이 필수로 들어가는데요. 전기가 통하지 않는 특수 절연 성질을 갖춘 그룹 3 기유가 핵심 원료로 쓰입니다. 최근에는 배터리와 서버를 통째로 담가 식히는 액침냉각 시장의 핵심 소재로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국내 정유사들은 이 고부가가치 시장에서 압도적인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SK이노베이션의 윤활유 자회사인 SK엔무브는 글로벌 그룹 3 시장에서 약 40%의 점유율로 전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에쓰오일 역시 단일 공장 기준 세계 최대 규모의 생산 시설을 가동 중입니다.
그룹 3는 글로벌 완성차 제조사들의 엄격한 규격 승인을 통과해야만 공급망에 들어갈 수 있어 진입 장벽이 매우 높습니다. 중동 핵심 생산업체들의 가동 차질로 대체재를 찾지 못한 글로벌 바이어들이 고품질 윤활기유 기술력을 갖춘 한국 정유사로 발길을 돌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본래 국내 정유사들의 실적은 국제 유가와 정제마진 등락에 절대적으로 좌우되는 구조로 유명합니다. 기름을 정제해 파는 본업 마진이 꺾이면 전사 실적이 고꾸라지곤 했던 건데요.
실제 곧 발표될 정유사들의 2분기 실적 기류는 그리 밝지 않은 상황인데요. 지난 1분기 정유 4사 합산 영업이익이 6조원에 육박했지만, 이는 글로벌 석유 수요 회복 등 본업 업황이 좋았다기보다 유가 상승에 따른 재고평가이익에 따른 장부 착시 영향이 컸던 탓입니다.
착시가 걷힌 2분기부터는 정유사들의 실적 부담이 한층 가중됐을 전망입니다. 지난 4월 중동 리스크 격화로 고가에 구매했던 원유가 1~2개월의 운송·정제 시차를 거쳐 시장에 풀렸다가 6월 들어 휴전 분위기 등으로 유가가 일시 하락했기 때문이죠. 비싸게 들여온 원유를 싸진 가격에 팔아야 하는 역래깅(원유 구매와 제품 판매 시차 손실)과 재고평가손실이 장부에 한꺼번에 반영된 영향입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과 에쓰오일의 올해 2분기 연결 기준 영업이익은 전 분기 대비 각각 34.7%, 24.1% 줄어들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에 석유류 최고가격제 시행에 따른 손실 보전금 정산 절차가 아직 다 마무리되지 않은 점도 향후 실적 변수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윤활기유는 유가 하락에도 시차를 두고 천천히 조정되는 특성이 있어 마진을 방어하기가 보다 수월합니다. 정유사 입장에서는 일찍이 구축해 둔 윤활기유 인프라와 점유율이 정제마진의 널뛰기 충격을 흡수할 든든한 방어선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동욱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금융시장의 국제 유가는 중동 휴전이나 운송 정상화 기대를 빠르게 반영하지만 윤활기유 실물 시장은 원료유 조달과 설비 재가동, 운송 경로 복구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며 "지정학적 리스크가 완화되더라도 윤활기유 이익은 단기간에 꺼지기보다 높은 수준을 길게 유지할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러면서 "특히 그룹 3는 중동 핵심 생산업체의 차질과 대체재 부족으로 2027년까지 구조적 공급 부족이 이어질 전망"이라며 "국내 정유사들이 단가가 높은 서구권 시장을 공략해 마진을 높이는 것은 물론 단순한 대체 공급자를 넘어 글로벌 고객사의 핵심 장기 조달처로 재평가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