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이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추진해 온 SK실트론 매각이 장기화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 두산그룹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하며 속도를 내는 듯했지만 인공지능(AI)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본격화하면서 협상 환경은 완전히 달라졌는데요. 재무 개선을 위해 내놓았던 자산이 AI 시대 핵심 전략 자산으로 재평가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리밸런싱'과 '반도체 공급망 강화'라는 두 과제가 맞물리면서 SK의 고민도 깊어지는 모습입니다.
반년 새 뒤집힌 SK실트론의 가치
23일 재계에 따르면, SK㈜와 두산은 SK실트론 매각 협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두산은 지난해 12월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지만 아직 본계약은 체결되지 않았죠. 시장 일각선 매각 철회 가능성도 제기됐으나 양측 모두 "협상은 계속 진행 중"이라는 입장입니다.
매각 대상은 SK㈜가 보유한 지분 51%와 총수익스와프(TRS) 계약 지분 19.6%를 포함한 70.6%입니다. 당시 시장에서는 SK실트론의 기업가치를 약 5조원 수준으로 평가했고 거래 규모는 3조~4조원대로 추산됐었죠. 그러나 반년 넘게 협상이 이어지는 사이 반도체 업황은 예상보다 빠르게 바뀌었습니다.
당초 SK그룹이 SK실트론 매각을 추진한 배경은 '리밸런싱'이었습니다.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편하고 차입 부담을 줄여 재무구조를 개선하겠다는 전략이었죠.
실제 지난해 말까지 SK실트론의 재무지표는 악화 흐름을 보였습니다. 영업이익은 2022년 5649억원에서 1931억원으로 감소했고요. 순차입금은 1조3126억원에서 2조4334억원으로 늘었습니다. 같은 기간 상각전영업이익(EBITDA) 대비 순차입금도 1.4배에서 5.3배로 상승했죠. 현금창출력에 비해 차입 부담이 빠르게 확대됐다는 의미입니다.
이후에도 차입 부담은 이어졌습니다. 올해 3월 말 기준 순차입금은 2조6242억원으로 증가했습니다. 총차입금은 3조855억원, 부채비율은 219.9%에 달했고요. EBITDA 대비 순차입금 배수는 9.1배까지 오른 반면, 1분기 영업이익은 88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76.7% 감소했습니다.
다만 이를 경쟁력 저하로 해석하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우세합니다. 대규모 선제 투자의 영향이 컸다는 분석인데요. SK실트론은 약 2조3000억원을 투입한 300㎜(12인치) 웨이퍼 신공장을 최근 본격 가동했습니다. 공교롭게도 투자 사이클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AI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면서 시장 여건도 우호적으로 바뀐 겁니다.
SK실트론의 전략적 가치도 한층 커졌습니다. AI 서버 투자 경쟁이 확산되면서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메모리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죠. SK하이닉스도 향후 5년 안에 웨이퍼 투입 기준 생산능력을 현재의 두 배 수준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내놨습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AI 반도체 공급 부족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최근 대한상공회의소 제주포럼에서 "내년 반도체 수요는 올해보다 60~100% 늘어날 수 있다"고 전망했고 앞서 엔비디아 GTC에서는 "웨이퍼 공급 부족이 2030년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웨이퍼는 반도체 회로를 형성하는 모든 공정의 출발점이 되는 핵심 소재입니다. AI 반도체 생산이 늘어날수록 웨이퍼 수요도 함께 증가할 수밖에 없죠.
국내 유일의 실리콘 웨이퍼 전문기업인 SK실트론은 300㎜ 웨이퍼 기준 글로벌 시장 3위권 업체입니다. AI 시대를 맞아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까닭입니다.
팔자니 아깝고, 안 팔자니 부담
시장 분위기가 바뀌면서 몸값도 뛰었습니다. 지난해 두산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될 당시 약 5조원으로 평가됐던 기업가치는 최근 7조원 안팎까지 거론됩니다.
일본 신에츠화학과 SUMCO 등 글로벌 웨이퍼 업체들의 주가가 AI 반도체 수혜 기대감으로 급등하면서 기업가치 재평가가 불가피해졌기 때문이죠. 업계는 협상이 길어진 배경에도 가격과 거래 조건을 둘러싼 양측의 입장 차가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최 회장이 강조하는 '풀스택 AI' 전략 역시 변수인데요. SK그룹은 SK하이닉스의 AI 메모리를 중심으로 AI 데이터센터·에너지 인프라, SK텔레콤의 AI 서비스까지 연결하는 수직계열화를 핵심 성장 전략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구상에서 SK실트론은 웨이퍼부터 메모리, AI 인프라까지 이어지는 가치사슬의 출발점입니다. 한때 리밸런싱 대상이었던 자산이 이제는 그룹의 AI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전략 자산으로 재평가받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물론 SK실트론을 매각한다고 해서 SK하이닉스의 공급망이 즉시 흔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SK하이닉스는 현재 여러 글로벌 업체에서 웨이퍼를 조달하고 있고, SK실트론 역시 다양한 반도체 기업을 고객사로 두고 있습니다.
매각을 철회하는 것도 부담입니다. 두산은 SK실트론 인수를 통해 반도체 소재와 후공정에 웨이퍼를 더한 밸류체인을 구축한다는 전략을 세워왔습니다.
이미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뒤 장기간 협상을 진행한 만큼 시장 상황 변화만을 이유로 거래를 중단할 경우 자본시장 신뢰와 양사 관계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두산은 현재도 인수 의사에는 변함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재계 관계자는 "협상이 길어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SK의 판단 기준이 재무 중심에서 AI 경쟁력 확보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결국 기업가치와 거래 조건에서 어느 수준의 접점을 찾느냐가 이번 거래의 성패를 가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