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0월8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신동주(오른쪽)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의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민유성(왼쪽) 전 산은금융지주 회장. |
5년 전이었을 겁니다. 당시 산은금융지주의 민유성 회장(現 나무코프 회장)과 저녁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쏙 들어간 내용이지만 그땐 산업은행 민영화가 신문지면을 장식하곤 했죠. 이명박 정부는 산업은행을 정책금융공사와 은행으로 쪼갠 뒤 은행을 민간에 매각하는 방안을 추진했습니다. 그 총대를 멘 사람이 민 회장이었구요.
◇ '색다른' 산은 민영화 논리
식사를 하면서 민영화를 왜 해야하는지 물었습니다. 민 회장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맞벌이 부부들은 아이를 맡길데가 없어 고민한다. 민영화로 마련한 재원으로 전국에 어린이집을 지어준다고 생각해보라.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면서 여성의 사회진출을 돕고, 보육교사 일자리까지 창출하는 사업이 가능하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당시 글로벌 투자은행(IB) 육성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산업은행을 민영화하려고 했습니다. 정부의 발표보다 민 회장의 설명이 더 설득력있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딱딱한 정책이나 메마른 금융에 상상력을 입히는 사람이었다고 할까요.
◇ 리먼 인수를 꿈꾼 민유성
민 회장의 꿈은 한국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2008년 산업은행은 미국의 리먼브라더스를 인수하려고 했었고, 그 중심에 리먼브라더스 서울지점 대표를 지낸 민 회장이 있었습니다. 끝내 뜻을 이루진 못했죠. 그는 한 대학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딜이었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리먼 인수를 포기한 것이 잘한 것인지 아닌지는 역사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리먼을 인수하려고 했던 이유 만큼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핵심은 인재육성과 국익이었는데요.
"월스트리트는 정보가 모이는 곳이고, 인재들이 모이는 곳이다. 산업은행 직원들을 그곳에 보내 그들과 동등한 실력을 갖춘 전문가로 키우고, 이들을 다시 세계 곳곳에 파견하면 그게 바로 국력 아닌가."
◇ 신동주 브레인으로 컴백
민 회장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지난해 10월8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였습니다. 그는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장남인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現 SDJ코퍼레이션 회장)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신 전 부회장은 동생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에게 경영권을 빼앗겨 절치부심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가 민 회장을 대동하고 나선 것을 보면서 '이 싸움이 만만치 않게 돌아가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뛰어난 상황 판단력과 승부사적 기질, 풍부한 인적 네트워크 등 민 회장의 장점이 많았으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민 회장은 롯데홀딩스 지분구조에서 약한 고리인 '종업원지주회'를 공략지점으로 설정했습니다. 종업원지주회는 롯데홀딩스의 지분 27.8%를 보유한 곳입니다. 광윤사에 이은 2대 주주지만 회사의 경영방침에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던 곳은 아닙니다. 롯데홀딩스가 직원들에게 월급 외 부수입을 안겨주기 위해 만든 곳으로 이해하면 쉽습니다. 적어도 경영권 분쟁이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죠.
◇ '돈으로 표심을…'
지난 19일 신 전 부회장은 롯데홀딩스 상장을 통해 종업원지주회에 1인당 2억5000만엔(우리돈 25억원)이 돌아가도록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전제조건은 임시주주총회에서 자신을 밀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000억엔(1조원) 사재출연도 약속했습니다. 그만큼 종업원지주회의 표심이 중요하다는 얘기겠죠. 신 전 부회장은 종업원지주회를 자신의 편에 세우면 롯데홀딩스 지분 50% 이상을 보유해 경영권 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동생에게 경영권을 빼앗길 정도로 야물지 못했던 신 전 부회장이 이런 통 큰 약속을 하기까지 민 회장이 여러 힘을 보탰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민 회장은 신 전 부회장이 일본에서 기자간담회를 열 때 한국에서 별도로 기자들과 만남을 갖고 신 전 부회장의 구상을 전했습니다. 비록 돈으로 환심을 산다는 비난을 들을지라도 지금은 승부수를 띄워 판을 유리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 "쓰쿠다 용납안돼" 소박한 애국심
하지만 신 전 부회장의 발표에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큰 돈을 써서라도 싸움에서 이기고 싶다는 간절함은 알겠는데 왜 그가 경영권을 잡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납득할 만한 답을 내놓지 않아서입니다. 민 회장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격호라는 우리나라 기업인이 세운 기업을 쓰쿠다가 가져가는 것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쓰쿠다는 롯데홀딩스의 사장입니다. 신 전 부회장에 따르면 그는 이번 경영권 분쟁에서 창업자인 신 총괄회장을 배신하고 차남(신동빈) 편에 선 인물입니다. 현재 롯데홀딩스에서 신동빈 회장 개인의 지분은 매우 적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지배구조가 계속되면 언젠가 월급쟁이 사장인 쓰쿠다의 손에 롯데의 경영권이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게 민 회장의 생각입니다.
회사를 만들고 키운 사람(신격호)은 따로 있는데 굴러온 돌(쓰쿠다)이 박힌 돌(신동주)을 빼내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 한국 롯데는 없었다
롯데는 재계 5위 그룹입니다. 직접고용과 간접고용 인원만 13만명에 달합니다. 민 회장의 정의감은 알겠지만, 단지 일본의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이 넘어가도록 해선 안된다는 논리는 '소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신 전 부회장이 경영권을 잡으면 롯데는 그 때부터 한국기업이 되는 건가요? 신 전 부회장의 구상대로 롯데홀딩스가 주식시장에 상장되면 일본인 주주들의 입김이 더 세지는 결과를 초래하진 않을까요?
적어도 신 전 부회장이 한일 롯데를 아우르는 경영을 하고 싶다면 현재 한국에서 롯데가 어떤 위기에 직면해 있는지, 그를 위한 해법은 무엇인지 정도는 언론에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롯데는 국내에서 압도적인 1위, 곧 '롯데가 아니면 안되는' 경쟁력을 가진 분야가 드뭅니다.
백화점 1위인 롯데백화점만 해도 현대백화점이나 신세계백화점이라는 경쟁자가 있고, 롯데마트만 하더라도 이마트와 홈플러스에 밀립니다. 과자를 꼭 롯데제과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전자제품을 하이마트 매장에서만 판매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체재가 풍부한 시장에서 언제 소비자들의 마음이 바뀔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그룹이 롯데입니다. 게다가 면세점과 홈쇼핑은 정부의 의지에 따라 생사가 좌우되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죠.
◇ '이겨도 지는' 싸움 속으로
롯데의 해외사업이 막대한 손실을 내고 있다며 동생(신동빈)을 공격하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협소한 국내시장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답을 내놓는 것도 신 전 부회장과 민 회장의 역할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일본 롯데홀딩스의 경영권을 잡으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싸움에서 이기는 게 중요하겠죠. 하지만 지금의 싸움은 아버지가 세운 회사를 내가 차지해야 한다는 절박함, 그 외의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생활하고, 한국 롯데를 잘 모르는 신 전 부회장은 그렇다고 칩시다. 대의(大義)와 자신의 목표를 일치시키고, 풍부한 상상력을 더해 사람들을 움직이던 민 회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국익과 세계시장을 조망하던 그가 형제간 다툼의 해결사로 등장하면서 외곬으로만 현상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현란한 기술과 머리만으로는 국민들에게 감동을 줄 순 없습니다. 민 회장은 지금 이겨도 지는, 그런 싸움으로 점점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