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하루앞둔 3일 '국민타자' 이승엽이 23년간의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그라운드를 떠났다. 당일 은퇴 경기에서 홈런을 2개나 뿜어낼 정도로, 실력으로 보면 아직 몇 년을 더 뛸수 있는 기량이지만 그는 미련없이 은퇴를 택했다.
국내 야구선수 중 이승엽만큼 사랑을 받은 경우는 드물다. 그는 1995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후 일본 생활을 제외하곤 줄곧 한팀에 몸담았다. 하지만 팀에 관계없이 모든 야구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시즌종료 두달전부터 은퇴 투어를 진행했다. 전국을 돌며 팬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각 구장의 홈 구단들이 나서 기념식을 치러줬다. 한국 프로야구 KBO 리그에서 은퇴 투어를 치룬 건 그가 처음이다. 야구 종주국인 미국에서도 은퇴 투어는 흔치않은 일이라고 한다. 선수 생애를 마무리하는 이에게는 최고 영광이다.
이승엽이 이처럼 '호사를 누릴 정도로' 사랑받았던 이유는 뭘까. 지역색이 강한 한국 프로야구의 풍토에서, 특히나 세대 및 이념적인 구분이 명확하고 진영 논리가 뚜렷한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현상은 점검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첫째는 실력이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타자였다. KBO리그 통산 최다 홈런인 467개를 때려냈다. 8년간의 일본 시절에 친 159개를 더하면 626개. 한국 미국 일본을 통틀어 역대 9위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홈런 외에도 통산 최다 안타, 타점 기록 등 쉽게 깨지기 힘든 대기록을 작성, 그야말로 한국 야구의 역사를 새로 썼다.
이승엽은 또 성실함과 꾸준한 노력이 멋지고 아름다운 덕목임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일본 생활을 마감하고 2011년 말 국내 리그에 복귀하면서 "과거 성적으로 주전을 보장받을 생각은 없다. 후배들과 치열하게 경쟁하겠다"고 선언했다. 가장 먼저 야구장에 출근해 몸을 만들었고, 매년 살아남기 위한 타격폼을 고민했다고 한다. 롤모델감이다.
'전국구 스타'가 되는데는 인간성도 크게 한몫했다. 스포츠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이지만 이승엽은 승리의 짜릿함을 넘어서는 감동을 줬다. 장외 홈런을 치고도 세레머니 없이 고개를 숙인채 다이아몬드를 돌았다. 최고의 희열을 만끽할수 있는 순간이지만 본인의 홈런으로 상대방 투수가 기죽으면 안된다는 마음에 오히려 미안해했다. 후배에 대한 배려, 동업자 정신, 겸손함은 상대팀을 응원하는 팬들의 마음도 움직였다.
이승엽은 태극마크를 달았을 때엔 국민을 하나로 만들었다.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준결승에서 일본을 상대로 터뜨린 홈런은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절체절명의 순간 터트린 한방은 국민들의 막힌 가슴을 그야말로 펑 뚫리게 만들었다.
스포츠가 지닌 특유의 묘미도 시너지 효과를 내며, 영웅 이승엽을 만드는데 일조한 듯하다. 국민들은 이승엽을 통해 야구를 즐기고, 야구를 통해 활력을 얻고 갑갑한 현실에서 희망을 본다. 실력 위주, 확실한 보상 체계, 탄력적인 승강시스템, 원활한 트레이드,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 챌린지 제도 등. 우리 사회가 이상적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풀어내기 시스템을 야구장에서는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스템에서 지존이었던 이승엽. 그가 마지막까지도 박수를 받는 것은 스스로 물러날 때를 아는, 아무나 할수 없는 덕목을 가졌기 때문이리라. "팬들은 지금 내게 만족할 지 몰라도, 나 스스로가 만족하지 못해 떠난다"는 말을 남긴 채 그는 떠나갔다. 그를 보고 자란, 그에게서 영감을 받아 새로 탄생할 영웅은 어떤 모습일까, 야구를 보는 또 하나의 재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