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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갑이다

  • 2017.09.24(일) 09:33


은행에 다니는 지인이 들려준 얘기다. 은행 영업점마다 '무서운' 고객이 따로 있다고 한다.

그가 근무하던 지점 인근에 콜센터가 입주해 있었는데, 점심을 마친 콜센터 직원들이 우르르 객장에 나타나면 초긴장 모드였다고. 그중 한 분이 은행 창구 직원과 상담하면서 이것 저것 꼬치꼬치 캐묻는데, 질문과 호기심은 거의 초등생 못지 않았다고 한다. 열과 성의를 다해서 한참 설명해주면 알겠다고 하면서 그냥 일어나 돌아서는데 그걸로 끝이 아니라고. 잊혀질만하면 다시 찾아와 지난번 그 상품에 대해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으니 재차 설명해 달라고해 난감케 했다는 거다.

텔레마케팅은 서비스 산업의 '극한직업' 중 최고봉에 속한다. 전화기 너머로 모르는 사람의 욕설과 폭언, 비하, 희롱 등의 수모를 견뎌야 한다.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고 항상 웃는 분위기와 상냥한 태도로 말을 건네야 한다. 대부분이 여성인 텔레마케터들이 겪는 고통과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이라고 한다.

나도 하루에 한두 번씩 받게 되는 텔레마케팅 전화. '말 못할 고충이 있으니 바쁘더라도 나름대로 성의있게 받아줘야지'라고 생각했던 그 텔레마케터가 은행원에게는 갑(甲)이었다니. 얘기를 듣고 나니 '서비스의 본질을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요구하는 수준도 남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은행원을 두둔하거나 콜센터에 근무하는 분들을 매도하려고 지인의 얘기를 꺼낸 것은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도 갑질을 하고 있구나'라고 새삼 깨닫게 된 바가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특수학교 건립 토론회 무릎 영상' 소식을 접하고 나서다. 토론회에서 참석자 장애자 엄마 한 분이 특수학교를 짓게 해달라고 호소하다 지역주민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지역주민 중 일부가 "쇼하지 마라"고 야유했다는 내용이다.

이 '영상'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댓글 반응도 뜨거웠는데, 어쨌든 내게 충격적인 건 서울에서 최근 15년간 공립 특수학교가 한 곳도 신설되지 못했다는 거다. 우리 동네냐 아니냐를 떠나, 그 15년간 서울에서 살고 있는 나도 이런 '꽉 막힌' 현실을 만든 데서 자유로울 수 없다. 즉 나도 '갑질'을 해왔던 거다. "내 뒷마당에서는 안 된다"는 이기주의(님비증후군)가 실상은 '집단 갑질'의 한쪽 면이었다.

갑질은 바로 내 주변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재벌 회장님의 운전사 폭행이나 프랜차이즈 본사의 가맹점에 대한 횡포, 군대 공관병을 머슴 부리듯이 대하는 사병화 등. 이것들만이 갑질이 아니다. 단순한 관계에서 복합적 형태로, 수직적 위계에서 수평 네트워크로 사회가 진화함에 따라 사람들 간의 관계도 크게 달라졌다. 새로운 갑을 관계 양상이, 갑질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누구에게나 로망이지만 왕자나 공주도 나름대로 고달프다. 왕족이나 귀족들은 평상시에는 호화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었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제일 먼저 희생되기 때문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다. 신분에 따른 각종 혜택을 받는 만큼 윤리적 의무도 다해야 한다.
  
사회 속에서의 관계가 달라지면 역할과 의무도 바뀌어야 한다. 이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누구에게만 강요할 수 없다. 내가 바뀌지 않고 상대에게만 변화를 기대한다면 '내로남불'에 갇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광화문 혁명을 계기로 우리 사회는 정상화의 길로 들어섰다. 새 틀에 맞는 소프트웨어의 변화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다. 변화는 나부터다. 우선 오늘 걸려올 텔레마케팅 전화에 좀 더 친절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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