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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경제와 5만원권의 함수

  • 2013.07.21(일) 19:03

5만원권 수요 급증
캐쉬이코노미와 지하경제 확대로 연결

우리나라 최고 액면가 화폐인 5만원권이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5만원권에 대한 논란은 지난 2009년 6월 발행 이후 계속돼 왔지만 박근혜 정부 들어 부작용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커지는 분위기다.

박근혜 정부들어 두드러지는 것은 5만원권 수요가 크게 증가하고, 풀린 돈은 금고나 장롱으로 숨어버리는 '고액권 퇴장' 현상이다. 한국은행에서 찍어내는 5만원권은 크게 늘어났는데, 다시 한은으로 돌아오는 5만원권은 발행액의 절반을 조금 웃도는 실정이다.

정부가 지하경제와 전면전을 선포하는 등 '지하경제 양성화'에 속도를 내면서 이같은 현상은 심화하고 있다. 은행에서는 고액 예금자들의 인출 수요가 증가하고, 5만원권 수요가 많아지면서 지난달에는 일부 지점에서 지급을 제한하는 현상도 빚어졌다. 백화점에서는 개인 금고 판매가 급증하고, 금고와 장롱속으로 숨어버리는 퇴장 현상도 눈에 띄게 늘었다.

21일에는 한 민간 경제연구소에서 지하경제 확대의 경고등이 켜지고 있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우리 경제에 화폐와 현금 거래 중심의 '캐쉬 이코노미(cash economy)'가 확대되고 있는데, 배경을 살펴보니 5만원권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 지하경제와 5만원권의 연관성

"화폐 발행액은 늘고 있지만 화폐의 실물경제 기여도는 하락하고 있다. 풀린 화폐는 제대로 돌지 않고 사라져 버리고, 사람들은 거래정보 파악이 어려운 현금거래를 늘리고 있다. 우리 경제의 캐쉬 이코노미 비중이 증가하고 이것이 지하경제 확대로 이어지지 않도록 신용카드 소득공제 축소나 폐지 등 제도변경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LG경제연구원이 21일 내놓은 보고서의 요지다.

보고서에 따르면 캐쉬이코노미는 지하경제(underground economy)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최근 우리 경제가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과 연관지으면 캐쉬 이코노미의 증가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 보고서의 지적이다. 경기회복이나 복지확대 등의 수요로 재정지출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지하경제가 확대될 경우 '세수부족 → 재정악화 → 세율인상 → 지하경제 확대'라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악순환의 진행 경로는 현재 우리 경제가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업들의 실적 악화와 국민들의 소비 위축으로 올해 사상 최악의 세수부족이 우려되면서 정부 재정에는 비상이 걸렸다. 박근혜 정부는 증세가 아니라 비과세·감면을 줄이는 등의 방법으로 재원을 조달하겠다고 했지만 증세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목소리는 점차 높아지고 있다. 세율인상 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려는 태세인 것이다. 세율을 높이면 세금을 피하기 위해 지하로 숨어드는 경제규모는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캐쉬 이코노미와 5만원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보고서는 캐쉬 이코노미가 확대되는 조짐들을 4가지로 설명하는데, 각각의 현상에 5만원권이 주연 내지 조연으로 등장한다.
 

첫째 화폐발행 잔액이 늘면서 우리 경제에 풀려있는 현금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 우리나라의 화폐 발행 잔액 증가율은 2005~2008년 5~6%대를 유지하다가 5만원권이 발행되면서 2009년 21.4%까지 상승했다. 이후 주춤했던 화폐발행 잔액 증가율은 올해 급증세로 돌아선다. 지난해말 11.7%까지 떨어졌지만 지난 5월말 14.9%로 3.2%p 높아졌다.

둘째 화폐 환수율이 빠르게 하락하면서 돈이 돌지 않고 있다는 것. 올해 1~5월 화폐 환수율은 76.4%에 그쳤다. 2007~2008년에는 95%대였고, 2009년 이후에도 80%대를 유지했다. 그런데 올들어 고액권을 중심으로 '퇴장 현상'이 두드러진다. 올들어 5월까지 5만원권 지폐의 환수율은 52.3%였다. 반 정도는 회수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5만원권 환수율(61.7%)과 비교하면 9.4%p 급감했다.

화폐발행 잔액이 늘고, 환수율이 급락하는 배경에 5만원권이 있다. 두 현상은 박근혜 정부가 대통령의 핵심 공약인 '지하경제 양성화'를 국정과제로 설정하고 국세청 등 관련부처가 지하경제와의 전면전을 선포한 시점과 맞물린다. 백화점에서 개인용 소형금고가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시중에서 5만원권 품귀현상이 빚어졌다는 얘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캐쉬 이코노미 확대 조짐의 세번째 근거는 화폐 유통속도가 하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화폐 유통속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실물경제 수준에 비해 화폐발행 규모가 과도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의미다. 보고서는 화폐 유통속도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기 시작한 시점이 5만원 발행이 시작된 2009년 하반기 이후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생산과 거래를 통해 부가가치 창출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는 화폐, 즉 5만원권이 실물 경제 성장속도에 비해 훨씬 빠르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카드거래가 줄어들고 있다는 데 있다. 올들어 4월까지 신용카드와 체크카드 등을 통틀어 전체 카드 지급결제는 전년동기 대비 2.7% 증가해 전년 동기 증가율(6.3%)에 비해 크게 둔화됐다. 그동안 카드를 통해 이뤄지던 지급결제 중 상당부분이 화폐(현금)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 우리나라 지하경제 비중, 상승세로 전환

보고서에 따르면 그동안 하락세를 보이던 우리나라 지하경제 비중도 상승세로 돌아섰다.
 
프레드리히 슈나이더* 교수가 지난해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지하경제 비중은 2000년 27.5%에서 2009년 24.5%까지 낮아졌지만, 2010년에는 24.7%로 다시 상승했다. (* 슈나이더 교수는 세계은행과 IMF 등 주요 국제기구들이 발표하는 국가별 지하경제 관련 자료를 제공해 온 학자다)

이 기간동안 선진국 모임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들의 지하경제 비중이 낮아지는 추세를 보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움직임은 국제적 흐름과는 반대방향으로 흘러왔다.
 
보고서는 "특히,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비중이 상승한 시점이 2009년 하반기 고액권 지폐인 5만원권이 발행되고 화폐 유통속도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기 시작한 직후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5만원권 발행이 캐쉬 이코노미의 증가를 부르고, 지하경제 비중을 늘리는 요인이 됐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보고서는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지하경제에서 자영업 요인의 비중이 OECD 회원국중 최고 수준인 점 등을 감안할 때 신용카드 소득공제 축소 내지 폐지는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보고서 작성자인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정부가 세수 확보 및 역진성 완화를 이유로 신용카드 소득공제 축소 및 폐지를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며 "1999년 도입돼 고소득 자영업자 세원 양성화에 큰 역할을 해 온 이 제도를 캐쉬이코노미 확대가 우려되는 현 시점에서 축소 또는 폐지하는 것은 지하경제 확대와 세수 감소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신용카드를 사용할 유인이 줄어들면서 현금거래 비중이 더 높아지고 그만큼 고소득 자용업자들의 세금탈루 가능성도 커진다는 것이다.

◇ 5만원권 논란 재연될까

5만원권이 지하경제를 부추기는 주범은 아니다. 일정수준의 고액권을 유통시켜도 될 만큼 우리나라 경제 규모가 커졌고, 지급이나 보관 등에서 편의성을 높이는 측면도 있다. 연간 수천억원에 달했던 10만원권 수표의 제작·유통·폐기 비용도 크게 줄어들었다. 5만원권 발행의 긍정적 효과다.

그동안 부정적 효과도 적지 않았다. 5만원권은 뇌물과 도박, 불법 증여, 재산 은닉 등 검은돈 거래에 주로 활용되며 눈총을 받아 왔다. 지난 2011에는 전북 김제의 한 마늘 밭에서 불법 인터넷 도박과 관련된 자금이 5만원짜리 뭉치로 110억원이나 발견되며 장안의 화제가 됐다. 각종 스캔들이나 불법자금 조성·보관에는 5만원권이 빠짐없이 등장했다.
 
5만원권 논란은 이 정부 들어 뜨거워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긍정적 요인보다 부정적 요인이 상대적으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하경제에 대한 단속이 강화될 경우 성형외과나 귀금속상 같이 현금거래가 많은 자영업자들은 소득을 숨기기 위해 5만원권을 보유할 개연성이 커진다. 가족 등의 계좌에 현금을 보관해 온 사람들도 노출 위험을 피하기 위해 고액권을 직접 보유하려는 유인이 높아지게 된다.

발행 당시 불거졌던 찬반 논란중 인플레이션 유발 등은 나타나지 않은 반면 현금거래를 이용한 뇌물공여, 소득탈루 등 음성적 거래의 증가 가능성은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 5만원권 발행과 연관돼 발생하는 현상들을 보면 5만원권이 지하경제 기반을 조성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에 일정 정도는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급과 가격을 통해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과세대상으로 드러나야 할 거래를 물밑으로 숨어버리게 만드는 통로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도 이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 현오석 부총리는 지난달 국회 대정부 질문 답변을 통해 "5만원권 품귀현상은 여러 가지 경제적 이유가 있겠지만, 일부 언론 보도대로 지하경제와 관련된 부분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인정했다.
 
대통령과 현 정부가 지하경제 양성화를 강조하고 강력한 세무조사에 나서면서 발생하는 역효과가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지하경제 양성화는 조세정의, 세원확보 차원에서 반드시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부작용은 어느 정도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지하경제 문제는 이 정부가 지속적·역점적으로 추진할 국정과제라는 점에서 앞으로 5만원권에 대한 논란은 가열될 공산이 크다. 지하경제와 관련된 부작용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5만원권을 계속 찍어내 시중에 푸는 것이 맞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대해 한국은행은 5만원권 품귀현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 만큼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특별한 수요급증 원인 등에 대해 모니터링을 진행하면서 발행에 임하겠다는 입장이다. 아직까지 발행이나 지급 자체를 제한할 만큼 부작용 및 역효과가 심각하지는 않지만 경각심을 갖고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그래프 출처 = LG경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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